근린산책의 필수 요소는 씻지 않은 몸이다.
머리를 감지 않고, 화장을 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예쁜 옷을 걸치지 않는다.
나는 얼핏 멀리서 보면 초등학생처럼 보인다. 사회적 외모를 입지 않은 나는 성인보다는 어린 아이로 분류된다. 미성년의, 비여성(무성)의 내가 되어 산책을 시작한다.
멋도, 청결함도, 여성성도, 나는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의 관심 밖, 시선 밖, 비존재 시민이 된다. 나는 그 상태로 동네를 산책한다. 덕분에 나는 이웃들을 관찰하고, 뜯어볼 수 있다.
공휴일 오후 1시 무렵, 버스에는 등산객이 가득 찬다. 나의 동네에는 유명하고 큰 산이 있다.
나는 버스를 탄 승객들 사이의 특이사항을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 술에 취한 등산객은 자신의 상태를 숨기는 일이 어렵다.
기사님 바로 뒷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에게 시선이 멈춘다. 그녀의 몸을 향해 쏟아질 듯이 비틀비틀 서 있는 남자와 함께. 그는 자신의 사타구니 인근을 있는 힘껏 여자의 다리 쪽으로 밀착시키고 있다. 그런 그와 얼굴을 맞대고 뭔가를 속삭이는 여자다.
“저 아줌마가 자꾸 쳐다봐.”
남자는 보란 듯이 여자의 볼에 뽀뽀를 한다.
뒤를 돌아보니 버스의 모두가 관람객 모드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중년 여성과 남성의 로맨스, 게다가 등산복을 입은 그들의 로맨스는 쉽게 ‘불륜’ 꼬리표가 따라붙게 된다. 과연 동네에서 보이는 등산객 중년 커플의 몇 퍼센트가 불륜이며 몇 퍼센트가 그렇지 아니할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 완전무결한 사랑이라는 것이, 성스런 관계가 존재하기나 할까.
한편 나는 내 앞의 저 남자와 여자에게 ‘가정’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뿐이다. ‘가정’이란 체제가 처음부터 없었다면 어땠겠느냔 생각도 잠시 한다.
근린산책의 두 번째 필수 요소는 사치스러운 식사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평소 방문하고 싶었던 동네식당이 나타났다.
나는 혼자이며 초라하고, 자신감도 없지만 20,000원짜리 화이트라구 파스타를 사먹기 위해 그 식당으로 들어간다. 직원들은 묘하게 퉁명스러운 태도로 나에게 자리를 안내한다. 20,000원 중 3,000원은 친절 값인 파스타를 먹으러 왔으나 3,000원치 친절은 손쉽게 사라진다. 나는 자격지심에 똘똘 뭉친 인간이므로 ‘아무래도 내 생김새 때문에 그들의 태도가 저러할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 한편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내 차림새와 외모로 이 식당의 문법을 파괴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모든 비사회적 움직임은 그것을 ‘운동’으로 치부하면 별일이 아니다.
“나는 지금 고급 식당 복장 다양화 운동에 참여 중이다.”
어떤 공간들의 선은 점점 두껍고 짙어진다. 아무도 ‘출입금지’ 시키지 않지만 내심 ‘출입금지’ 당한 기분이 든다. 그런 공간이 늘어난다.
아마도 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꾸밈 노동의 방식을 잃으면 잃을수록, 몸에 살이 붙으면 붙을수록 나의 공간은 점점 줄어들겠지. 그럴수록 당당해지기 연습이 필요하겠다.
생각보다 그저 그랬던 서비스와 맛을 보여준 동네 레스토랑을 빠져나온다. 근린산책의 마지막 코스는 역시나 목욕이다. ‘점점 깨끗해지기’는 이 산책의 중요한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오늘은 종로 세검정에 있는 목욕물이 좋기로 소문난 한 사우나를 방문했다. 2711번 버스를 탔고, 오후 4시가 다 된 공휴일의 버스는 역시나 혼잡하다. 아쉽게도 등산객 커플은 찾아볼 수 없다.
이곳의 탕은 두 종류가 준비되어 있다. 42도의 미지근한 물 탕, 그리고 47도의 뜨거운 물 탕. 5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두 탕의 진짜 온도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나는 미지근한 물 탕의 온도에는 만족할 수 없지만 뜨거운 물 탕에는 발을 넣는 것조차 힘들다. 뜨거운 물 탕에서 잠시 씨름하다 지친 나는 목욕탕의 다른 공간으로 시선을 옮긴다.
두 명의 아주머니가 나체로 누워 있는 온돌 바닥. 나는 그들처럼 수건을 깔고 온돌 바닥 위에 몸을 누인다. 따뜻하게 등을 데워 주는 온돌의 적당한 온도에 감탄한다.
머리 위, 작게 열린 창문에서는 시원한 봄 바람이 밀려든다. 나는 눈을 감고, 온돌에 누운 우리의 모습을 상상한다. 곧 초밥 위에 올라갈 횟감처럼 보일 것이다. 뜨거운 탕에서 익어 버린 우리의 몸은 새빨갛기 때문에 연어 뱃살 따위로 보인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깊은 잠에 빠져든다.
42도의 미지근한 물에는 9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 아이 하나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내가 탕 안으로 들어가자 나의 몸을 훑어 보는 아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이의 시선은 노골적이지 않다. 깔끔하고 명확한 궁금증. 그런 아이의 시선은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나는 아이가 더 구체적으로 나를 뜯어 볼 수 있도록 아이의 시선을 허용한다. 시선을 허용하는 방식은 매우 간단하다. 그 아이와 눈을 맞추지 않으면 된다. 나는 일부러 냉탕 쪽을 응시하거나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뜨니 아이는 탕을 떠나고 없다.
나도 저 아이처럼 쳐다보는 아이였다. 어른들이 궁금한 아이였다. 그들이 나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를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을 때면, 아주 긴 시간 그들을 훔쳐보곤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몰랐다. 어른들이 너그럽고도 다정하게 나의 시선을 허용해 왔다는 사실을. 내가 어른이 되어 아이의 시선을 허용하고 난 이후에야 알게 된다. 이렇게 하나씩 알게 된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거의 오후 6시가 되었다. 나는 또다시 세검정 산책을 시작한다. 계속 걷다 보면 홍제역이 나온단다. 지도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나는 홍제역이 아니라 다른 것을 찾아 걷기로 한다. 휴대폰은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끝이 없는 걷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