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5월의 마지막 날 쓰는 편지입니다. 요즘은 새로 사귄 미국인 친구 Andy와 자주 대화를 나눕니다. 우리는 통화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간’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너의 시간 7시에 연락줘.”
“그럼 나의 시간 8시인가?”
“아니아니 6시일걸?”
“그런가.”
“그럴걸…”
“너의 시간 7시, 나의 시간 6시에 전화해.”
지금은 한국의 오후 3시 54분, 메릴랜드의 오전 2시 54분입니다. 한국은 곧 하루가 끝나지만, 미국은 곧 하루가 시작합니다. 한국의 5월은 곧 끝나지만 미국의 5월은 하루 뒤 끝납니다. 나는 앞선 시간을 살고, Andy는 뒤따라옵니다.
Andy의 하루가 저물며 우리의 통화는 끝이 납니다. 나는 “잘자”하고 말하며 내 하루를 시작합니다.
Andy의 시간을 떠올리고 있자면 나는 나에게 지금 당장 주어진 일을 하염없이 미루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내가 잠들어 있는 까만 밤, 누군가 내 하루와 내 시간, 나의 일들을 이어받아 대신 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뭐든 어깨 뒤로 패쓰해 넘기기!
“네가 좀 해 줘.”
“해줄 수 있지?”
나의 일을 이어받아 줄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나는 조금씩 가벼워집니다.
*
몇 달 전 아주 간만에 이어달리기라는 것을 해보았습니다. 당시 소속돼 있던 러닝동아리에서 10km달리기 훈련을 마치고, 훈련 부장은 약 40여명의 우리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두 팀으로 나누어 이어달리기를 할 거예요.”
이런, 나는 20명의 팀원 중 첫번째 주자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달리기 주자는 부담스러운 중책이었던지라 미루고 미루고, 밀려서 첫째 줄에 선 제가 우연히 그 임무를 맡게 됩니다. 상대편 첫번째 주자는 남성입니다.
여자는 기세! 달리기는 기세!
반전은 없었고, 상대팀의 그는 지나치게 빨랐습니다. 상대팀과 우리팀은 반바퀴가 차이나는 채로 경기를 이어갑니다. 내가 깎아 먹은 우리팀의 반바퀴! 우리팀의 기세!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낙담한 채로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40명의 주자들이 원을 만들고 선 운동장에서 나는 문득 중학교 때 나를 죽도록 싫어했던 남자애H가 떠올랐습니다. 중학교 남자애들 무리의 대빵이었던 걔는 어쩌면 나를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80퍼센트의 확률로 그는 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겠지요. 하지만 걔가 나에게 했던 폭력적인 행동과 말들은 ‘나를 죽도록 싫어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굴 리가 없다’고 느낄만한 수준입니다. 나는 살면서 다른 사람을 걔처럼 끔찍하게 대해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죽도록 미워했던 사람들에게도 걔처럼 대해보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그 애는 중학교 2학년의 운동회 도중 나에게 씨이발- 외쳤습니다. 반 전체가 함께 하는 단체줄넘기에서 나는 줄에 발이 걸려 버렸고 우리 반은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 애는 두 번째 시도에서도 또 한번 줄에 발이 걸린 나에게, 당혹감을 어쩌지 못하고 피식 웃어버린 나에게 외쳤습니다. 씨이발 웃기냐.
미친놈. 평생 걔보다 못된 인간들이랑 한 마을 이루고 살았으면 좋겠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우리팀은 이어달리기에서 졌습니다. 처음 차이 나던 반바퀴를 만회하고, 만회하여 간발의 차이로 경쟁을 끝낼 수 있었던 건, 이것이 이어달리기이기 때문이겠지요.
*
요 며칠 나는 이 편지를 써야한다고 매일 아침마다 생각했습니다. 나는 생각더미를 헤집고, 몇 문장의 메모를 적어 두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편지를 완성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다음 날의 나에게 생각을 패쓰했고, 그 생각을 이어 받은 나는 막중해진 부담감 때문에 또 다시 다음 날의 나에게 패쓰!
그리고 오늘의 내가 이어 받아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편지는 과거의 나들로부터 이어 받은 단상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글이라는 것. 나는 그저 지금 당장 내 기분과 생각을 정돈 안 된 채로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내가 이어 받았던 것들은 어디로 흘러가 버린 걸까요.
*
최근 팟캐스트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살살살기 운동본부>라는 제목의 팟캐스트인데 매주 쓰는 이 편지와 매주 업로드하는 나의 유튜브 영상물, 그리고 팟캐스트가 한 구슬에 꿰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한 가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은 탱탱볼이 되어 각자의 창작물에 이리 튀고, 저리 튀어 오르겠지요. 불규칙적이고, 미완성인 채로. 나는 탱탱볼의 움직임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며 그런대로 자유롭게 두어 볼까 합니다.
나는 몇 번이고 줄에 걸려 단체줄넘기를 망쳐 놓겠지만
그럼 좀 어때! 무책임하게 넘겨 버리면 그만~
“네가 좀 해 줘.”
튀어 오르고, 이어받고, 연결되며 될 대로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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