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주로 영상을 고민하고, 만들고, 업로드하는 일에 내 일상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나에게 영상 만들기는 남들이 말하는 ‘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주일에 두 번쯤 영상을 업로드하게 되는데 나는 영상이 업로드 되는 날이면 어딘가로 숨어든다. 정확히는 휴대폰을 절대 볼 수 없는 곳으로. 휴대폰을 사용할래야 사용할 수 없는 곳으로. 대중목욕탕, 영화관, 비행기, 휴대폰 없는 산책길이 대표적이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가. 영상에 대한 반응들. 댓글수와 조회수. 그런 수치들. 혹시 모를 나쁜 반응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겁이 난다. 두려움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나는 그 두려움으로부터 멀리 숨어 버리기를 선택한다.
이것은 나의 영리한 스트레스 관리법 중 하나일까, 혹은 내가 이 일을 더이상 해서는 안 된다는 위험 신호일까.
오늘은 경희궁의 한 독립영화관이 당첨되었다. 이곳에서 홍상수의 새로 나온 영화를 본다. 영화가 다 끝난 오후 8시 20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핸드폰의 전원을 켜고, 영상의 반응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두려움을 이길만한 무시무시한 궁금증. 나는 궁금하다. 내가 혹시 무엇이 되어 있을까하고. 24년째 아무것도 되지 못했지만 내가 숨어 있었던 단 두 시간 안에 내가 뭐라도 되어 있을까 하고. 그런 순진무구함과 희망이 뒤얽힌 나의 휴대폰. 나는 버스 안에서, 바로 그 휴대폰 때문에 결국 또다시 익숙한 절망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었지 이런 바보 같고 무용한 생각들이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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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가방에 손을 집어 넣었을 때 휴대폰 대신 반려책이 먼저 만져지게 될 것이다. 그럼 나는 잠깐의 궁금증을 누르고, 운명에 몸을 내맡긴 채 반려책을 읽으며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절망을 집 안까지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휴대폰을 켜고, 영상의 반응들을 확인하게 되겠지.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절망의 시간을 이리저리 도망치며 유예해봐도 나는 휴대폰을 마주한 순간 괜찮지가 않다. 그것은 나의 삼 일 혹은 일주일을 갈아 넣은 노고의 결과, 가족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를 포기하고 편집한 결말, 시간이라는 가능성을 ’조회수‘에 팔아넘긴 나라는 인간의 결정.
나는 사실 괜찮지가 않다. 충분히 강해졌다 믿은 나는 여전히, 이정도로 연약하다.
뭘 고작 영상 하나로 이렇게까지 과민하고, 과잉 해석하고, 과로하느냐고. 누군가 묻겠지. 나는 일평생 뭐가 이렇게 과하느냐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던 사람이라 익숙하다. 과하게 열심이고, 눈치 보고, 우울하고, 생각 많지. 뭐든 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일 수 없으니까 그런 질문은 우선 접어두시라.
영화는 곧 시작된다. 나는 휴대폰을 꺼야한다. 따라서 이렇게 어정쩡한 끝을 맺는 글. 모르겠다. 나는 글 안에서만은, 이 편지 안에서만은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안전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곳은 나에게 대중목욕탕처럼, 영화관처럼 도망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영화과 끝난 뒤 휴대폰을 켜게 되면 유튜브가 아니라 답장 편지를 볼 수 있도록, 답장을 보내주세요. 이왕이면 아주 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