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크리스마스에 내 친구 림과 함께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갔다. 막 성인이 된 나는 지금까지 못한 일들을 왕창 해보고 싶었다.
호텔 크리스마스 파티에 입고 갈 옷을 한 달 전부터 골랐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나는 부담스러웠고, 심지어는 무서웠다. 호텔 파티만큼이나 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쩐지 고급스럽고, 부유하고, 즐거운 분위기.
어울리지 않는 곳에 최대한 어울려 보일 수 있도록 화려하고, 비싼 옷을 골랐다. 나는 이 낯선 공간에서 능숙하고 싶었나 보다.
그날 림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어른이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림은 고등학생 때부터 어른이 될 준비를 마친 사람 같았다. 굽이 높은 호피 문양 또각 구두와 아주 짧은 붉은 색 가죽 치마, 림은 파티를 위해 새 옷을 사지 않았다. 아무거나 걸쳐도 예쁘다는 자신감이었을까, 단순한 귀찮음, 혹은 이전의 파티 경험 덕이었을까. 림에게는 어디서 뿜어져 나오는지 모를 여유로움이 있었다.
파티장에 들어가자마자 림은 이곳저곳 불려다녔다. 그곳에는 그녀가 다니는 예술학교의 선후배들이 포진해 있었다. 모델과 학생들과 연기과 학생들은 유난히 반짝이는 외모를 뽐내며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고상하게 걸어 다녔다. DJ들이 무대에 올랐다가 사라지고, 그 주변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는 무대 정중앙에서 엉덩이를 흔들어보기도 하고, 칵테일바 근처를 서성이며 이런저런 다양한 맛의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대화 중인 사람들 사이에 껴서 고개를 끄덕여 보기도 했다. 이 공간에 나름대로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 내 모습에 취하며.
몇 분 뒤 지쳐 버린 나는 가장 구석진 공간에 놓여 있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때 저 멀리 림이 보였다. 스탠딩 탁자에 사람들 여럿과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웃고 있는 림의 얼굴이 연기에 휩싸였다. 이곳에 완전히 적응해 버린 그 애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때 봤던 림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애가 여전히 어색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내가 앉은 소파에는 이 파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짐짓 상기된 표정으로 부끄러워하는 이들과 함께 있으니 비로소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한 상태에 돌입했다. 그때 여수에서 왔다는 한 언니가 내 곱슬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너 참 귀엽다…”
아, 뻔한 말.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워져 버린 그 말을 이곳에서 들으니 마음이 편해져서 기쁘게 활짝 웃어 보였다. 가슴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 짧은 원피스를 입고, 어설프게 아이라인을 그려 어른을 흉내 낸 내가 여전히 귀여워 보이는구나. 나는 내가 안전하게 귀여울 수 있는 공간을 그리워하는 중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뻔한 일상과 익숙한 얼굴들, 무엇보다 우리 집. 나는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얼마 후 림은 나에게 돌아왔다.
“더 신나는 곳이 있어.”
오늘은 크리스마스였고, 우리가 벼르던 하루였다. 제대로 놀아야만 하는 날이었다. 나는 차마 집에 가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이곳에서의 모든 것이 즐거웠던 듯이 연기하기도 했다. 능숙하지 않은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이태원의 한 지하 클럽으로 향했다.
계단 한 칸을 내려갈 때마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점점 더 짙게 코끝에 고였다. 아디다스 집업을 입고, 운동하듯이 춤을 추는 여자들, 기다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한 손에 술잔을 들고, 클럽의 끝에서 끝을 끊임없이 오가며 사람들을 스캔하는 남자, 담배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장면.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두려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좋겠다.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영영 모르고 싶은 세계가 있다.
며칠 전 애인은 내 생일에 호캉스를 가자고 권했다. 나는 처음으로 클럽에 갔던 날처럼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비싼 호텔과 내가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싼 옷, 가방, 음식은 나에게 어색하기만 한 사치였다.
“너는 좋은 것을 충분히 누려야 하는 사람이야.”
애인은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낯선 공간에서 내가 흐릿해지는 기분이다. 공간에 압도당해 내가 사라져 버리는 기분. 내 생일에는 오롯이 나다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뿐이다.
공간을 장악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요즘 나는 어디서든 물처럼 잘 섞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파티장에서 낯선 옷을 입고, 엉덩이를 흔들며 어색하게 웃던 스무 살 무렵의 나처럼 앞으로도 ‘익숙한 척’ 기술을 늘려갈 테다. 그럼 언젠가는 정말 모든 것에 덤덤하고, 능숙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를 숨기고, 장소에 녹아드는 법을 배우면서.
오늘은 핑크 바지를 입고, 종로의 한 카페에서 노래를 들으며 글을 좀 쓰고 있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장소에서의 하루다.
누군가는 안락함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편안함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누리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은 진정으로 펴유일무이한 하루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