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향해 가는 전차를 탔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이 봄에, 불, 이란 단어를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는 나의 성정 때문이다. 나는 벚꽃을 보면서도 불 생각을 한다. 올해 여름은 참 덥겠다, 땀이 많이 나겠네, 밤 산책을 해야지.
불, 을 생각하면 그 여름 캠프파이어가 떠오른다. 그 더운 날 우리는 불 앞에 모여 앉아 가만히 불을 응시하고 있다.
“눈을 감아보세요….. 우리네 부모님들은 아침 일찍부터 직장에 나가셔서…”
그 순간 꼭 눈을 뜨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외친다.
“선생님 여기 누가 훌쩍거리는 것 같은데…”
모두가 눈을 감았을 때 눈을 뜨는 아이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새를 틈타 코를 파는 아이, 부모님 생각에 우는 아이, 그리고 자신과 함께 눈을 뜨고 있는 다른 아이.
나는 조용히 눈을 뜨는 아이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이들의 눈을 감은 얼굴을 한 명 한 명 뚫어지게 바라본다. 분명 다 아는 얼굴들인데 낯설게 보인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울고 있는 아이들은 마음 깊숙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리고 다시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고 있자면 훈기와 그 유난한 밝음 너머 농후한 어둠을 목격한다. 아, 불과 사람은 참 닮았구나.
예진은 그날 새벽 가위에 눌렸다. 2층 침대에서 자고 있던 예진이 고함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팔을 쭉 뻗고, 창문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 저기에…”
예진이는 거기에 귀신이 있다고 했다. 레이스 원피스 잠옷을 입은 예진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침대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겁에 질린 채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우리 방의 누군가가 선생님 숙소로 달려갔고, 체육 선생님이 달려왔다. 선생님은 예진을 공주님 안기로 들쳐 안고, 보건실을 향해 달렸다. 나는 멀어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방문을 닫았다.
우리는 그날 밤 예진이 가리켰던 창문을 등지고, 잠을 잤다. 세 명이 한 침대에 모여서 서로의 손을 꼭 붙들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예진은 아무렇지 않게 우리 방에 다시 나타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고속버스에 예진과 나는 나란히 앉았다. 나는 예진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그 애는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실은… 다 거짓말이야.”
나는 비밀스럽게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그 애가 좀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예진이 좀 좋아졌다. 고백하자면 나도 체육 선생님의 품에 안겨 있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 말을 예진에게 하지는 않았다.
그날 고속버스에서는 전날 밤 남자아이들의 숙소에서 진행되었던 진실게임에 관해 이야기가 돌았다. 아이들은 심심하면 꼭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했다.
“야, 진실로가 최유진 좋아한대.”
고속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진실로는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나 점잖기만하던 실로가 일순 버스에서 일어나 소문을 낸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그 애의 입에 손가락을 다 넣고, 입꼬리를 찢듯이 양옆으로 당겼다. 둘의 싸움이 어떻게 끝났더라...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실로와 단 한마디도 주고받지 못했다.
불을 생각하면 이런 것이 먼저 떠오른다. 눈을 뜨면 보이는 다면적인 사람들의 얼굴.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언젠가부터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재빨리 내 약점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다. 나의 열등감, 나의 실패, 나의 무능. 그럼 그 여름의 캠프파이어에서 나와 눈을 마주쳤던 아이처럼, 비슷한 시선으로 나를 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는 아주 높은 확률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그리고 그의 여린 속살을 바라보고 있자면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눈을 감아 보세요.”
나는 몰래 눈을 뜨고, 무언의 시간을 견딘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바라본다. 이내 고개를 든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아, 내 주위에는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이제 우리는 남들 다 하는 그런 이야기 말고, 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있잖아, 나는 사실…로 시작하는 진짜 내밀한 이야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