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에 대해 생각하면 ‘성급함’이란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번뜩이는 이야기가 오면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것의 손을 잡고 여유 시간을 기다린다. 시간이 나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나의 이야기는 무르익기도 전에 따 먹은 방울토마토처럼 푸릇하고, 시큼하다. 그렇게 쓴 소설은 서너 번의 변화를 맞이하는데 그러면서 겨울에서 여름까지 계절이 큰 폭으로 몇 번이고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자주 실패한다. 나에게 온 이야기가 처음부터 별로였던 것은 아니다. 다 ‘성급함’의 문제다. 그렇다고 오래 이야기를 묵혀 두면 만사 괜찮아지는 건 아니다. 사실 도전해 보지도 않았다. 이야기는 제철에 수확하지 않으면 어차피 버려진다. 묵혀둔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농약을 많이 친 작위적인 맛이 날 뿐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좋은 이야기가 여기 있소, 뽐내지 않을 수 있는 여유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에 소설이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최근 두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공교롭게도 두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가 꽤 비슷해서 (심지어는 어떤 장면들이 꽤 닮아 있다) 놀랐다. 두 영화 모두 평평하게 소개해 보자면, 퀴어 청소년 남성의 사랑을 담고 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루카스 돈트 감독의 <클로즈>, 두 번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이었다. ‘계집애 같다’며 놀림 받는 친구에게 끌림을 느끼지만 반 아이들의 시선을 신경 써 그 아이에게 오히려 모질 게 구는 상대편 남자아이, 둘이 결국 사랑의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이야기가 극단을 맞는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스토리는 꽤 많이 닮았다. 하지만 영화의 서사 진행 방식은 사뭇 다르다.
전자인 <클로즈>는 이야기를 성급하게 쓴 대표적 영화로 꼽을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본 뒤 크게 실망했다는 설명을 부득이 더해야겠다. 남자아이 둘의 사랑의 감정은 주위 시선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고, 결국 한 아이의 자살로 이야기는 파국을 맞는다. 영화에서 주목하는 건, 남겨진 아이의 감정과 시선인데 나는 도저히 영화의 주제의식을 쫓을 수 없었다. 남자아이의 죽음으로 자극적 사건을 보여주면서, 빨갛게 물드는 풍경과 신파로 치닫는 장면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야기는 멈추지 못하는 전자처럼 빠르게 결말을 향해 치달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있다고, 그것을 뽐내고 보여주기에 급급한 영화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은 조금 달랐다. 두 남자아이의 마음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영화의 끝까지 끈질기게 숨겨둔다. 이야기까지 가는 길은 아득하고, 스산하다. 그리고 맞이한 두 아이의 이야기는 놀랍도록 아름답게 그려진다. 아름다움의 이유는 단순하다. 흔적 없이 깔끔하게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순수를 해치지 않고, 거기까지 가닿는 힘은 놀라웠다. 곧 터져 버릴 듯이 생동하면서 동시에 “침착한” 서사 작법의 방식이었다.
이야기는 예상되는 그곳이 아니라 더 달려 나간 저곳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한 번 더 확장된다.
숲속 비밀 공간, 폐열차 안에서 두 아이는 어른들이 없는 순수한 자신들만의 공간을 짓는다. 작은 우주처럼 보이는 그 공간으로 숨어든 아이는 산사태가 멎기를 함께 기다린다. 태풍이 지나가고 해가 떴을 때 아이들은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폐열차 바깥으로, 그리고 숲속으로 달려 나온다.
아이들은 풀숲을 헤치며 자유롭게 달린다.
“우린 다시 태어난 걸까?”
“그런 것 없는 것 같아.”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영화 내부에 있었고, 마지막 장면에서 이야기는 비로소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영화 내부에서 서사가 다시 탄생하는 방식이다.
새로운 이야기란 없다. 따라서 어떤 이야기는 이미 닳고 닳았는데 똑같은 모양으로 재현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괴물> 같이 이야기를 전하는 영화를 보며 또 한번 배운다. 똑똑한 침착함으로 그 자리를 지키며 한참을 기다리는 이야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터질 준비를 하다 뻥. 그렇게 완전히 새것이 되는 이야기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