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챙길까?
B가 말했다.
아니 아몬드나 좀 챙기자
둘은 어젯밤 에어프라이어로 아몬드를 구웠다. B는 아몬드를 작은 꽃무늬 손수건에 감싼 뒤 주머니에 넣었다. B는 목도리를 두르고, 낡은 패딩을 입었다. A는 그 패딩이 싫다고 말했지만 B는 고집을 부리며 그것을 입었다.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계단으로 걸어 내려왔다. 얼마 전 A가 엘리베이터에 갇힌 일 때문에 A에게는 엘리베이터 트라우마가 생겼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B는 A와 함께 6층 높이의 계단을 함께 올라줄 것이었다. A는 B의 그런 면이 고마웠다. 고통을 나누긴커녕 두 배가 될지라도 옆에 있어 주겠다는 의지.
둘은 함께 치과로 향했다. 1년 동안 A는 스케일링을 받아야지, 받아야지 생각하며 미뤄두었다. 돌아보면 그런 일이 많다. 환불하려고 박스에 넣어둔 목도리, 세탁을 맡기기 위해 모은 셔츠들, 그리고 이불 빨래. 둘은 그것들을 연말에 몰아 해결하곤 했다. 둘이 치과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였고, 오후 진료를 막 시작한 시간이었다.
예약하셨어요?
아니요.
오래 기다리셔야 할 텐데…
둘은 치과 소파에 앉아 TV에서 흘러나오는 수상한 예능 방송을 멍하니 시청했다. 문득 1년 전 B의 사랑니를 뽑기 위해 치과에 함께 왔던 날이 떠올랐다. 둘은 아플 때 옆에 있어 주는 사이, 같이 병원에 가는 사이였다. 오래 기다려야 한다더니 A의 이름은 금세 불렸다. B는 A를 진료 의자로 데려다준 뒤 A의 패딩을 벗겨 가져가 주었다. 잠시 뒤 스케일링이 시작되었다. A는 너무 무서워서 양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을 글썽였다. 아프면 왼손을 들라는 말에 A는 여러 번 속절 없이 왼손을 들고 말았다.
아프세요?
그게 아니고… 겁이 나서.
사실 A는 아프지 않았다. 스케일링 기구의 전동드릴 같은 소리가 무서웠을 뿐이다. A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는 채로 윗니의 앞면 하나, 둘, 셋… 기계가 잇몸 근처를 훑고 지나가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꼈다. 윗니의 앞면이 끝나면 뒷면, 그리고 아랫니의 앞면과 뒷면. A는 눈을 감고 이 시간이 얼른 끝나기를 기도했다. 끝! 사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어. 일이 다 끝나면 A는 자신이 엄살을 피웠다는 걸 그제야 깨닫곤 했다. 물양치를 할 때 피 맛이 났다. 혀끝으로 잇몸을 쓸어보니 치석을 제거한 곳 구석구석에 피가 고여 있었다.
치과를 나온 둘은 복권을 한 장 사기로 했다. 오늘은 올해 남은 마지막 하루니까. 특별하게. B는 자리에 앉아 망설임 없이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17 26 29 30. 그들은 한 장의 복권만 산 뒤 재빨리 복권방을 빠져나왔다. 복권방에는 그야말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다 모여들기 때문에 지하철 1호선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그래서 둘은 복권방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삶이 시들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1등이 된다면 필리핀으로 가서 매일 4시간씩만 일하며 살 거야.
A가 말했다.
4시간씩 무슨 일을 할 건데?
B가 물었다.
태권도나 운전을 가르쳐야지.
둘 다 네가 그닥 잘하는 게 아니네?
응. 그런 걸로 돈을 버는 게 좋아.
A는 B의 손에서 복권을 뺏어 자기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B는 집으로 돌아가 대청소를 하고 싶었지만 A는 더 오래 산책을 하고 싶었다. A는 오늘 하루 동안 3000보도 채 걷지 못했다. 둘은 거대한 트리가 있는 카페까지, 딱 거기까지만 더 걷기로 했다. 통창 카페 너머로 휘황하게 불빛을 내뿜는 트리를 보러 둘은 자주 그곳까지 걸어가곤 했다. 걸으면서 B는 A에게 아몬드를 까서 줬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를 재빨리 털어 아몬드 껍질을 바닥에 버렸다. 가져온 아몬드를 다 먹을 때까지 카페는 나타나지 않았다. B는 지친 듯 말했다.
멀어.
더 가보자.
조금 더 걸으니 카페가 나왔다. 불이 꺼져 있는 걸 보니 문을 닫은 모양이다. 카페 정중앙에 진열돼 있던 거대한 트리도 사라졌다. 크리스마스는 고작 일주일 전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A는 드디어 오늘 하루 만 보를 걸었다.
집에 도착한 둘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6층 집은 실은 8층 높이다. 둘이 사는 건물은 지하 2층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A는 B의 눈치를 봤다. 계단을 올라야 한단 걸 기억했다면 더 걷자는 제안은 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A는 후회했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니 상쾌했고, 조금씩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어 다행이었다. B는 계단을 올라오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급기야 A와 두 층이나 차이가 벌어졌다. B는 결국 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고작 한 층이지만 여기까지야 싶은, 더 이상 원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어떤 구간이 있다는 걸 A는 이해했다. A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B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해 줬다.
드디어 집에 돌아온 둘은 먼지 쌓인 바닥에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6시간 뒤면 한 해가 끝난다. 그들은 하루 사이에 일 년을 다 산 사람들처럼 지쳐 있었다. 왜일까. 아무래도 그들에게 지난 1년이라는 긴 시간이 몰아치고 있었다.
웃을 일이 많을까? 울 일이 많을까? 산술적으로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말이야.
B는 패딩 주머니에서 먹다 남은 아몬드를 꺼내며 말했다. 울 일이 많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A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주머니에 넣어둔 복권이 잘 있나 한번 스윽 만져 보았을 뿐이다. 초침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A는 잠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