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you. Good night.
제널린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스카이프를 껐다. 제널린이 먼저 전화를 끊는 법은 없었다. 늘 내가 먼저. 제널린은 그저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가끔은 제널린이 see ya! 말하는 도중에 내가 실수로 먼저 전화를 끊기도 하였다. 우리의 마지막 통화는 정말 이렇게 끝이 났고, 나는 노트북을 덮고 한참을 울었다.
제널린 쌤을 처음 만난 건 석 달 전이다. 하루에 30분씩 매일 누군가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면 내 영어 스피킹이 좀 괜찮아질까, 막연한 기대를 품고 전화 영어를 시작했다. 오후 9시, 스카이프로 제널린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제널린의 프로필 사진이 나타났다. 전화를 받자 스카이프 화면 너머로 제널린 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널린 쌤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약간 긴장한 채로 더듬더듬 나를 소개했는데 느리고, 어눌한 내 한마디, 한마디에 제널린은 크고 유쾌하게 반응해 줬다.
첫날의 수업 시간은 놀랍도록 빨리 지나갔는데 더 놀라운 것은 제널린이 수업 내내 그녀의 완벽한 미소를 단 한 순간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척이나 적절하고, 투명해서 아름다워 보이는 미소, 어떻게 저렇게 아무 속내도 없이 사랑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나는 단 하루 만에 그녀 앞에서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상태로 유약해졌다. 한편 그녀가 나를 위해 억지로 웃어주는 것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라게 됐다. 억지로 웃는 일은 정말이지 괴로우니까.
그렇다. 나는 제널린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퇴근 후 급히 밥을 챙겨 먹고, 저녁 9시에 노트북 앞에 앉아 영어를 말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제널린과 대화를 하고 나면 마음이 풍족해져 내일도 또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어떤 사람이 싫다는 이야기, 회사에서 왠지 우울해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친구와 다퉈 속상하다는 이야기, 사실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지만 숨겨두고 있었던 작은 감정들을 제널린에게는 다 말하게 됐다.
나는 제널린의 하루 일과에 대해서도 꽤나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녀는 새벽 6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준비한다. 찬물로 머리를 감고, 노란 지프니를 타고 출근한다. 회사에서 그녀는 일본일 대상 화상 영어 강사다. 그녀는 플랫폼에서 랜덤으로 매치되는 사람들과 몇 분씩 대화를 이어가야 했는데 그들 중 무례한 사람들도 꽤 있다고 했다. 점심으로는 도시락을 먹고, 오후 5시까지 일을 한다. 그리고 지프니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의 영어 강사로 두 번째 출근을 한다.
그녀의 하루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면 알수록 나는 그녀에게 미묘한 부채감이 쌓였다. 영어 스피킹을 잘하기 위해 시작한 전화영어임으로 내가 말을 많이 하는 상황이 당연한데도 그녀가 내 이야기를 듣는 게 힘들진 않을까, 화면 앞에서 고개를 끄덕여주고 나를 향해 늘 웃어 주는 게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저렴하다며 좋아했던 전화영어 수강료도 마음에 걸렸다. 제널린과 나를 연결해주는 업체에서 수수료도 많이 떼어 갈텐데 제널린이 나에게 양질의 수업을 제공한 만큼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 건 아닌지 덜컥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마음, 이런 부채감을 느끼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미웠다. 너는 뭐 얼마나 잘났다고 제널린을 걱정하냐 어? 매일 나를 타박하곤 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제널린에게 좋은 학생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야근을 하거나 약속이 생기면 당연하다는 듯이 제널린과의 화상 수업을 몇 번이고 미뤘다. 수업을 미뤄도 추가 금액을 내야 하거나 패널티가 없어서 더 그랬다. 나는 수업을 미룰 때마다 제널린과의 약속을 깨고 제널린의 시간을 뺏고 있다는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제널린보다 나의 일정과 생활을 중시했다.
제널린은 수업을 며칠 빠진 뒤 다시 돌아온 나에게 수업에 빠지는 건 정말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건 괜찮은 일이 아니라는 걸 나와 제널린 모두에게 상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널린에게 기묘한 슬픔을 품고 있는 나에 반해 제널린은 내게 깨끗한 응원과 감탄만을 보내주는 사람이었다. 내 유튜브를 구독하고, 이해할 수 없는 한국어 영상을 다 봤다고 말해주었고,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포기하지 말라고 나를 북돋아 주었다. 영어 실력이 점점 좋아진다고 격려해주었고, 너는 참 친절한 사람이라고 칭찬해주었다.
매달 가족들에게 소득의 절반을 보낸다는 제널린, 돈을 몇 년간 더 모아야만 한국에 여행 올 수있다는 제널린, 하루에 10시간 넘게 일하는 제널린. 우리의 삶과 문화는 달랐고, 그래서 제널린의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런 내 모습은 들켰을까? 내 어떤 태도가 제널린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을까? 수업이 다 끝난 뒤 내 모습을 곱씹었다.
하지만 제널린은 언제나 건강한 자존감을 뿌리처럼 품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신기하고, 위대해 보였다. 제널린은 그 누구의 삶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저 응원하고, 웃어줄 것 같았다.
우리는 자주 필리핀과 한국의 여자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나는 반 년 전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민소매를 입어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제널린에 들려줬다. 한국 여자들 중 일부는 자신의 신체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그 중 하나가 나였다고. 나는 통통해 보이는 내 팔을 오래 미워했다고 말했다.
제널린은 화면 속 민소매를 입은 내 모습을 바라보며 말해주었다.
내가 먼저 너의 팔을 좋아해줄게.
나는 제널린 쌤과 대화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아무것도 충고하거나 제단하지 않고, 상대에게 꼭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제널린. 그리고 멋지게 반응하며 들어주는 제널린. 그런 그녀 앞에서 나는 자주 부끄러워졌다.
필리핀의 가장 큰 명절은 크리스마스다. 제널린은 돌아올 크리스마스에 무려 1년만에 어머니가 사는 본가로 내려갈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본가에서는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아 화상 수업을 할 수 없으므로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12월이 되면 제널린 쌤이 본가에 갈 수 있도록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12월이 되기도 전에 나는 화상 수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영어 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너무 바빠 몸이 아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연결해주던 끈이 일순 끊겼다.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고, 강력히 연결돼 있었는데 그녀는 세 달 간 내 모든 것을 들어주는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한순간 우리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제널린이 보고 싶어 약간 눈물이 난다.
제널린에게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할까 생각하며 퇴근길이 괜찮았고, 슬픈 마음이 가득 찬 날에도 제널린을 만나면 행복했다. 마지막으로 제널린을 만나 제널린을 사랑하는 내 마음에 대해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제널린 우리 꼭 다시 만나요.
한국에 오면 우리가 그동안 이야기했던 수많은 한국 음식을 전부 다 대접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