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화요일마다 러닝 훈련을 받고 있다. 러닝 크루의 훈련부장들이 나의 러닝 자세를 끊임없이 지적 해주고, 멈추지 않고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독려한다. 그들 덕분에 나는 매주 나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낮은 계단을 한 칸씩 오르고 있다는, 아무튼 오르고 있다는 감각은 나를 조금씩 더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하루는 인터벌 훈련으로 4:00페이스(1km를 4분 안에 달리는 속도를 의미함) 200m(운동장 반 바퀴) 달리기를 15번 반복해야 했다. 한 번도 달려보지 않은 빠른 속도라 겁이 났고, 훈련 중에도 숨이 차 내내 괴로웠다. 그날의 뿌듯한 훈련이 끝난 뒤 훈련부장은 지나가는 말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400 뛰는 여자! 어때요?”
모르겠다. 훈련부장의 말에 일순 여러 생각이 동시에 스쳤다. 나는 내가 지난 몇 년간 들어온 수많은 칭호 중에 바로 이것, 400 뛰는 여자,가 가장 마음에 든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남성의 입에서 튀어나온 ‘여자’라는 단어가 내 귀에 이렇게 편안하게 들린 것이 간만이라 신기했다.
근래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서 ‘여성’으로 불리거나 ‘여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공동체에서 여성이 되는 상황을 거부하기 위해 특별히 어떤 노력(숏컷 혹은 삭발을 하는 등 여성답지 않다고 불리우는 방식의 외형 변화)을 한 건 아니지만 스스로 여성이라고 인식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무의식적으로 여성은 비교적 취약하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더 거만하게, 조금은 덜 쭈뼛대며 사람들을 대했다는 것이 노력이라면 노력일까. 종종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일부러 ‘쩍벌 자세’로 앉아 보기도 하였다. 나는 이런 것이 ‘여성답지 않다’고 배웠으므로. 아무래도 나는 여성이란 내 정체성이 꽤 싫은 모양이다.
이러한 나의 노력은 생리를 시작하며 무참히 짓밟히곤 한다. 남들보다 극심한 생리통으로 한 달의 삼사일은 없는 날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 나는 생리가 시작하는 동시에 여성이라는 성별이 나를 옭아매고 옥죈다고 느낀다. 교수가 “여성분들은 잘 모르겠지만”을 습관적으로 남발할 때나 “여자는 이쪽 남자는 저쪽”으로 줄을 세울 때보다 더, 나의 성별이 내 뒤로 바짝 쫓아온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기 시작한다. ‘여성’이 나를 붙잡아 나를 옥죄기 전에 재빨리 달려 나를 ‘여성’으로부터 구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자유롭기 위해 택한 유일한 방식이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러닝을 시작했다. 어디서든 달릴 수 있고,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자유로울 것. 단순히 강한 여성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잘 뛰는 여성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달릴 때만큼은 ‘여성’이란 나의 성별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달리기를 다 끝낸 뒤 붙잡힌 “400 뛰는 여자”라는 단어에 무참히 즐거워져 버린 것일까. 남들보다 뒤처져 뛸 때마다 앞선 남성들의 뒤꽁무니를 노려보며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거 보여줘 봐’ 아무도 시키지 않은 여자 대표를 자처하고 나서는 것일까. 여자가 아니라기엔 너무 여성 근처에 있는 나, 여성들이 정말 좋은 나, 여성인 나도 좋아해 주고 싶은 나.
10월엔 매일 달리기를 시도하겠다 호언장담했으나 10월의 첫 주 생리가 시작되었고, 생리 시작 3일 차 나는 덜 나은 몸을 이끌고 운동복을 입었다. 신발 끈을 묶으며 이렇게까지 뛸 일인가 싶다가도 이것 말고 지금 당장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할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저녁 10시, 차 없는 골목 이곳저곳을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기를 하면서 가슴이 덜렁거리고, 생리혈이 마를 일 없는 여성이라는 사실이 더욱 자명해지기만 한다. 나는 여성이고, 여성의 틀을 깰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나는 400 뛰는 여자. 아픈 몸을 어떻게든 이끌고 나온 여자. 이 모든 수식어를 끌어안고, 나는 조금만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일단 300 뛰는 여자가 되어 보기로 한다.
덧,
그리고 나는 오늘도 한 뼘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생리 이야기를 한다. 되도록 더 자주 이것에 관해 이야기할 것을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