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얼마전 관람했던 뮤지컬 <테레즈 라캥>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에게 뮤지컬 장르가 매력적인 이유는 작위적인 서사 구성 때문이라는 점을 먼저 밝혀 둬야겠다.
“납득이 안 돼 납득이”
뮤지컬을 보고 이렇게 외치는 건 뮤지컬한테 해서는 안 될 짓이다.
노래 부르다 갑자기 사랑에 빠지고 노래 부르다 갑자기 사람을 죽이고. 그러니까 뮤지컬을 보며 납득이 안 되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쫓아가는 것에 뮤지컬 관람의 방점이 찍혀 있지 않다. 나는 과격하게, 폭풍처럼 흘러가는 뮤지컬 서사를 어떤 상징이라고 생각하게 되곤 한다.
<테레즈 라캥>의 서사는 이러하다. 어릴 적 고모의 집에 맡겨진 테레즈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오갈 데 없어지고, 아픈 고모의 아들인 카미유를 함께 돌보게 된다. 그러다 카미유와 정해진 수순처럼 결혼하고, 라캥 집안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카미유의 친구인 로랑을 만난다. 카미유와 달리 건강한 신체, 직업을 가지고 있는 로랑에게 빠져든다. 결국 로랑과 사랑에 빠지고 카미유를 죽여 라캥 집안에서 도망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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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를 죽이는 장면까지 이 극은 놀랍도록 빠르게 전개된다. 납득 되지 않는 장면들에 굳이 태클 걸지 않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 뮤지컬의 모든 말도 안 되는 서사를 그저 하나의 상징처럼 느끼곤 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원래 좀 지독한 면이 있지 않은가.
내가 사는 지금 이 세계는 내가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체로 끔찍하다. 불안과 불만 욕망 후회가 뒤얽혀 나를 옭아매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테레즈는 로랑을 만난 뒤, 현실을 사는 우리 누구에게도 없는 유일하고, 비밀스러운 만병통치약을 알게 된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로랑은 억압받고, 후회뿐인 테레즈의 삶을 되돌릴 수 있다고, 그 삭제의 가능성을 은밀하게, 지속해서 속삭인다. 그런 속삭임을 들은 사람치고, 로랑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사실 테레즈뿐 아니라 평범한 우리 모두는(특히 나의 경우) 단 한 번의 단순한 파괴를 기다리고 있다. 현실에 적응하며 그럭저럭 살아갈 뿐이지, 될 수 있다면 다른 삶을 살고 싶다.
테레즈와 우리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테레즈는 다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현실을 혐오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우리는 안주했지만 그녀는 꿈꾸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테레즈는 남편만 죽으면 자유를 찾을 거라고 믿었지만, 로랑과 함께 남편을 죽인 뒤 너무 쉽게 그 꿈이 산산조각 난다. 그녀는 ‘다른 삶’을 택한 죗값을 톡톡히 치른다.
테레즈는 그녀의 결정을 뒤늦게 후회한다. 그녀의 안락했던 ‘현재’가 괜찮았던 삶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런 테레즈를 보면서 안도한다. 우리는 여기 ‘현재’에 있기 때문이다. 삶의 파괴와는 등을 진 채로.
동시에 그녀의 파괴를 지켜보며 느끼는 이 안도감이 뮤지컬이 숨겨둔 진짜 의도처럼 보인다.
관객은 그녀로부터 의미심장한 조롱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레즈의 후회는 곧 관객에게로 옮아온다. 그리고 다시 테레즈와 로랑은 관객을 향해 함께 속삭인다.
네가 ‘다른 삶’을 택하지 않고 ‘현재’를 살기 때문에 너는 더 큰 후회를 경험하게 될 거야.
언젠가. 언젠가.
관객은 현재를 끊임없이 유예하는 한심한 존재로 전락한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그녀는 후련해 보였다. 마음에 짐이 가득 쌓여 버린 관객들과는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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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현재’라는 안락함과 답답함을 내던져 버린 테레즈는 마치 벌을 받고 있는 아이처럼 보인다.
특히 극 전체를 관통하며 테레즈의 감시자 역할을 하는 고모의 시선 때문에 더더욱 테레즈가 벌을 받는 것만 같다.
그녀는 왜 벌을 받을까, 라고 생각하며 한편 이 연극을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읽게 된다.
테레즈는 이곳으로도, 저곳으로도 갈 수 없는 한 시대의 길 잃은 여성의 모습을 대변한다.
돌봄 노동, 남편의 사랑스러운 아내, 보편적 여성의 역할극 바깥으로 벗어날 경우 벌을 받고, 다시 세계로 발을 들일 수 없다.
길 잃은 그녀의 울부짖음, 로랑을 향해 “네가 내 삶을 망쳤다”고 외치는 테레즈를 보며 어쩌면 로랑은 처음부터 그의 구원자가 아니라 그녀를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해 나타난 악마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동시에 영화 <아가씨> 속 아주 유명한 이 문장이 떠오른다.
“내 삶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히데코와 숙희가 서로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로랑은 테레즈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던 이유. 그 사이에 ‘로랑’의 성별이 놓여 있다.
로랑은 그녀를 결코 가부장적 세계에서 벗어나게 허락하지 않았다.
남편이 죽었지만 테레즈는 여전히 라캥의 집에 로랑과 함께 남는다. 심지어 라캥은 로랑을 자기 아들의 대체제로 위안하며 로랑과 테레즈의 결혼을 밀어붙이기까지 한다.
남편까지 죽었지만 그 집을 떠나기는커녕 또 다른 방식으로 정상 가족을 이루게 된다.
남편의 죽음 이후 그녀의 절망은 되풀이되는 끔찍한 속박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점은 그만 고모의 집을 떠나자는 테레즈의 말을 들었을 때 로랑의 반응이다.
그는 “이토록 안락하고 좋은 집을 두고” 왜 떠나느냐며 아이처럼 집구석에 웅크린다.
“떠날 테면 너 혼자 떠나라”고 손을 휘휘 내젓기까지 한다.
이토록 안전한 남성 중심 가부장제 세상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려 하는 듯한 로랑의 행동을 보며 확신했다. 로랑은 테레즈를 사랑으로 유인한 악마가 맞다고.
*
매일 다른 후회를 지칠 줄도 모르고 하는 나는 최근에 이런 문장을 읽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
2만 개도 넘게 인간의 후회를 모아온 다니엘 핑크는 말한다.
“후회의 뚜껑을 열어보면 그 동력은 스토리텔링입니다. 우리는 머릿속 타임머신에 올라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요. 그리고 그 과거의 이야기를 고쳐 씁니다.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이지요. 과거를 바꿨으니 현재의 이야기도 바뀔 수 밖에요 참으로 신통한 재주죠!”
인간의 후회라는 감정에는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다. 그 덕에 인간만이 시간 여행 능력을 갖춘다.
후회 속에 갇혀 삶을 영위하는 테레즈의 모습은 언뜻 봤을 때 벌을 받는 것 같기도, 따라서 관객들에게 죄악을 저질러선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테레즈의 이야기를 하나의 상징으로 여긴다.
테레즈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그녀는 평생 라캥의 집에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테레즈는 라캥의 집에서 카미유의 아내로 사는 삶이 너무 지겨워 머릿속으로만 온갖 일탈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녀는 일탈 이후의 삶을 최대한 끔찍하게 그려내 어떻게든 현재를 버텨내려 한다.
'로랑과 사랑에 빠진다면 나는 후회할 거야, 남편을 죽인다면 나는 후회할 거야.'
후회를 상상하며 삶은 이러나, 저러나 참 별 거 없다고, 불안과 불만 욕망 후회가 뒤얽힌 건 어떤 삶이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것이다. 빠져 나올 수 없는 현실의 굴레에서.
테레즈의 다독임은 대체로 진실일테고.
그녀에게 후회란 이야기의 시작인 동시에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기묘한 동력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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