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아빠에게 서울 여행을 제안했다.
우리 아빠는 여행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벗어나기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집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나가는 게 싫다며 취직을 포기했을까. 그는 청량리에서 30년을, 남양주에서 20년을 살고 있다. 남들 다 스마트폰 쓰는 시대에 여전히 2G 폰 사용을 고수하며.
나는 살면서 우리 아빠만큼 새로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러한 그의 기질은 그가 나이 들며 더 심해졌는데 아마 아무도 그가 그렇게 사는 것에 태클을 걸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가족은 존중이란 이름으로 어느 정도 그를 집 안에 방치해두었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되고, 아빠는 백신에 대한 무한 불신으로 가족 중 유일하게, 내 주변 사람 중 유일하게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코로나가 겁이 난다며 외식을 일절 거부했다. 안 그래도 우리 동네에 그가 방문하길 원하는 외식 장소는 세 곳 정도로 손에 꼽혔다. 그는 코로나 이후 예전부터 오랫동안 원했던 일이라는 듯이 영화관도, 카페도, 술집도, 백화점도 어디로든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당연히 여행도 거부했다.
그는 집 안을 맴돌았다. 가끔 은행에 가고, 이발소에 갔다. 한 시간 정도 외출한 뒤 다시 집에 돌아와 책을 읽고, 노트북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와 여행을 간다고?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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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다 보니 아빠의 기질에 대한 기억은 옅어지고, 큰 폭으로 아빠에 대한 안쓰러움이 증가했다. 그래서 제안한 여행이었다. 여행이란 별 게 없었다. 용산에서 만나 밥을 먹고, 박물관에서 연극 한 편을 보는 것.
부모님은 KTX를 타고, 용산역에서 내렸다. 먼 길은 아닌데도 KTX를 타고 왔다는 이유만으로 여행을 온 것 같다고 했다. 방문을 계획했던 양식당까지 걸어가는 도중 아빠는 김치찌개나 찜닭, 중식을 가리키며 아무래도 파스타 같은 것보다는 저런 게 더 맛있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냥 파스타를 먹으러 가자고 아빠를 이끌었다. 단순히 아빠를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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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우리 가족도 평범한 가족 흉내를 내기 위해 여행을 떠나곤 했다. 새 장소에서 늘 아빠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걸 기억한다. 생각해보면 변화를 싫어하는 그에게 여행이란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을까.
그런 그가 유일하게 떠나는 여행지는 강원도 고성이다. 그곳의 ‘금강산 콘도’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사실 익숙한 것이라면 그는 무엇이든 좋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번은 고성으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새로운 숙소에 머물고 싶었던 엄마가 한옥 형태의 숙소를 예약해두었다. 그날 아빠는 이런 곳에서 “거지 체험” 하고 싶지 않다며 “금강산 콘도를 내놔” 라고 외쳤고 (각색은 있지만 진짜다…) 결국 우리 네 식구는 절망하며 금강산 콘도로 향했다. 이 사건은 우리 아빠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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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오늘의 짧은 서울 여행에서 주도권은 내가 꽉 쥐고 싶었다. 엄마가 거의 평생에 거쳐 꺾지 못한 아빠의 고집을 이제 나는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빠는 2년만에 외식이라고 말했다. 아빠를 집 밖으로 끌어낸 것만으로 나는 승자였다. 하지만 아빠는 파스타를 먹으면서 계속 코로나 얘기를 하며 나를 공격했다.
“이렇게 테이블이 가까우면 진짜 코로나에 걸리겠어.”
나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꿋꿋이 밥을 먹었다. 순간 나는 여행을 온 것인가, 싸우러 온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사이좋게 식사 중이지만 나는 어떻게든 아빠를 이기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빠는 밥을 먹으면서 일상적으로 내게 몇 마디의 악담을 내뱉었고, 아 이러니까 아빠 싫다, 아빠 싫다, 했지 내 미움을 되돌아보며 식사를 마쳤다. 그쯤 나는 퀘스트를 처리하는 용사의 마음으로 식사에 임하고 있었다.
밥을 먹고, 박물관까지 걸어가면서 아빠는 아빠가 택시 운전사로 살았던 시절 얘기를 해줬다.
아빠는 길치였는데 매일 낯선 사람을 태우고 잘못된 길로 들어가곤 했다. 그는 자꾸 길을 잃었고, 그럴 때마다 자꾸 길을 잃기만 했던 아빠의 삶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보는 것 같았다.
한번은 이태원까지 사람을 태워가는데 택시비가 23000원이 나왔다. 그는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인 것만 같아 택시비 3000원을 깎아주었다. 길을 잘못 들지도, 길을 헤매지도 않았는데 아빠는 자신이 잘못한 것만 같았단다.
아빠는 택시 운전사를 3개월만 하고 그만뒀다.
매일 새로운 길에 들어서야 하는 것이, 매일 길을 잃고, 돈을 깎아주는 것이 괴로웠다고 한다.
그 뒤로 아빠는 한 곳에 정착해 있는 일만 했다. 익숙한 공간에서 예외 없는 생활. 모텔과 노래방 카운터를 봤고, 오랫동안 고시원에서 수능 공부를 했다. 예외 없는 생활은 아빠를 깜짝 놀래키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그것으로 그의 삶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자꾸 집 안에서, 카운터 안에서 고시원 안에서 길을 헤맬까. 남들이 바깥에서 하는 일을 안에서 반복하는 사람처럼.
엄마와 친척들은 우리 아빠가 집 안에서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어서 행복하고 편안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남들보다 몇 배쯤 더 괴롭고, 불행할 것만 같았다. 적어도 누군가와 함께 길을 헤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빠는 언제나 내 눈에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지루한 방랑자 같다.
그래서 나는 그런 아빠에게 자꾸만 싸움을 걸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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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박물관 야경이 예쁘다며 신상 Z플립을 꺼내들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다. 아빠는 엄마를 따라 2G폰을 꺼내 박물관 야경 사진을 찍었다.
아빠는 2G폰을 반대로 돌려 요상한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알고 보니 그의 휴대폰 카메라는 셀카 모드로 설정돼 있었다. 그는 일반 모드로 카메라를 돌려 놓는 법을 몰라서 늘 카메라를 돌려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며 카메라를 일반 모드로 설정했다. 아빠의 오래된 2G폰으로 제대로 사진이 찍힐 리가 없는데 그는 화질이 어떻든 그냥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으로 뭘 어쩌려고? 물어보니 아빠는 가끔 화장실에서 찍은 사진들을 돌려본다고 했다. 아무래도 아빠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웃기는 사람이다.
아빠와 싸우고 싶은 마음 끝에는 아빠가 비로소 길을 찾길 바란다는 마음이 놓여 있다. 아빠가 이제 조금만 덜 외롭게 오래 헤맨 길찾기에 성공하길 바란다.
하지만 아빠가 자신을 가둬둔 아늑한 세계 또한 아빠만의 미로일지 모른다고, 이제는 조금씩 이해해보려 한다.
짧은 서울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며 아빠는 말한다.
“죽을 때 오늘 여기 온 거 기억하겠다.”
아빠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면, 그 여행이 만족스러우면 꼭 그렇게 말하곤 했다. 금강산 콘도에 갔을 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는 조금 더 자주 아빠에게 싸움을 걸어야지. 화장실에서 2G폰 화면 너머로 오늘을 기억할 아빠를 생각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