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하나 하자면 저는 아직 헤어질 결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남들은 헤어질 결심에 흠뻑 빠져 지내다가 마침내 이토록 인상적인 영화로부터 헤어질 결심을 하는 와중에 아직 영화를 감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져 무작정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주말 9시, 상봉 영화관. 영화 시간표를 그제야 확인합니다.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상영 시간은 7시였어요. 아… 딱히 서럽지는 않았습니다. 영화를 꼭 봐야만 하는 건 아니었거든요. 영화관에 온 기분을 내고 싶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영화관을 좋아하게 된 건 팝콘 냄새와 엄마 때문입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온 엄마 손을 잡고 영화관에 가곤 했어요. 엄마 손도, 팝콘도 모두 내 손안에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고, 기뻤어요.
짜디짠 팝콘을 씹으면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바깥의 근심 걱정은 잠깐 모습을 감췄어요. 영화를 보는 시간은 저에게 둘도 없는 휴식 시간이었어요.
그러니까 영화관에 가고 싶다, 는 생각은 엄마를 보고 싶다, 는 생각과 쉬고 싶다는 생각이 이리저리 뒤얽힌 마음입니다.
아직 영화관 매대에서 직원들이 팝콘을 튀기고 있고, 잔잔한 목소리로 수다를 떨고 있어요. 팝콘의 고소한 향을 맡으며 화장실도 한번 갔다가 상영 중인 영화 팸플릿도 뒤적여봅니다. 영화관을 이렇게 떠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리고 문득, 영화관의 구석진 자리에서 안마 의자를 발견합니다. 1000원을 내면 10분 동안 마사지해주는 안마 의자.
마침 지갑에는 딱 2000원이 남아 있네요. 안마기에 1000원을 투입합니다. 이제 돈을 냈으니 10분 동안 영화관에 머물 명분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수도 없이 거쳐 간 안마 의자의 머리 부근은 가죽이 더럽게 벗겨져 있네요. 10분이나 몸을 내맡길만한 쾌적한 의자는 아니지만, 용기를 내 털썩 주저앉아봅니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 안마기가 손목을 옥죄네요. 이제 안마기에 몸을 맡긴 채, 커다란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광고를 응시합니다. 문득 눈이 피로해져서 눈까지 감아봅니다. 이번에는 매대에서 직원들이 수다 떠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 졸리다. 왜 이렇게나 졸릴까 생각해보니 이번 주 제대로 잠을 잔 날이 얼마 되지 않아요. 매일 7시간의 취침, 3시간의 유흥이 필요한 저에게 요즘의 바쁜 생활은 잘 맞지 않아요.
어렸을 때 엄마는 제가 심야 영화를 보자, 라고 말하면 늘 별말 없이 따라나섰어요. 같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엄마 쪽을 돌아보면 엄마는 늘 잠들어 있었어요. 압도적인 영화관 스크린 앞에서 어떻게 잠을 잘 수 있는 건지. 코를 골거나 입을 헤 벌리고 잠을 자는 엄마를 힐끗 보고, 한숨을 쉬곤 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오면서 엄마 옆구리를 쿡 찔렀어요. 엄마는 왜 나랑 같이 영화를 즐길 수 없는 건지 원망스러워서요. 새벽 두 시가 다 되어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곧바로 너무 빨리 잠들어 버렸어요.
몇 달 전에는 저도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잠이 든 적이 있어요. 피곤한 상태로 도피하듯이 영화관을 찾았어요. 힘들 때 영화관에서 쉬어 가는 건 오랜 습관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피곤이 밀려와 잠이 들었어요. 영화가 끝날 때쯤 눈을 떴을 때 찝찝했어요. 정확히는 망했다, 하고 생각했어요. 나도 이렇게 엄마처럼 피곤해 죽겠는 사람이 되었구나. 시간이 흐르면 점점 더 영화를 볼 수 없는 사람이 되겠구나. 그날 이후로 영화관에 갈 때마다 늘 망설여요. 최상의 컨디션으로만 영화관에 가야 할 것 같아서요. 또 영화관에서 잠을 자고, 망했다, 하는 불쾌한 감각을 느끼고 싶지 않았어요.
어릴 땐 몰랐어요. 고작 영화 한 편 보는데 어른에게는 얼마나 많은 결심이 필요한지.
얼마 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피리 부는 사나이’ 편에서 이런 대사를 마주합니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합니다. (…) 나중엔 너무 늦습니다.
불안이 가득한 삶 속에서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찾기에는 너무 늦습니다.”
이 대사를 듣고 마음이 울렁였던 건, 어른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아가고 있기 때문일까요. 불안이 가득한 삶, 영화 한 편을 보면 내일 두 배로 피로할 하루가 두려운 삶,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해야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할 거라고 동동거리는 삶, 영화에 10000원을 쓰느니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힘을 내 내일을 살아가자고 다독이게 되는 삶.
몰랐는데 어른의 삶은 꽤 불안합니다. 불안한 채로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발버둥 칩니다.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더럽지만 유능한 안마 의자, TV에서 나오는 광고 소리와 웅웅 울리는 사람들 목소리, 아 참 좋다 생각하는 사이 잠이 들어 버렸어요.
그리고 바로 지금,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뜨는 1초의 순간, 문득 여러 장면을 동시에 떠올립니다. 고속버스에서 잠을 자다가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눈을 뜨는 기분, 찜질방에서 낮잠을 실컷 자다가 소금방에서 찜질을 끝내고 나온 엄마가 이제 얼음방 가자, 외치는 목소리. 마음껏 풀어져도 괜찮은 순간을 떠올립니다.
그 1초의 감각을 붙잡으려 온몸에 힘을 줍니다. 1초의 감각은 이름 그대로 1초 만에 사라지고 말았네요. 그래도 1초의 감각 덕에 씩씩하게 몸을 일으켜 집까지 걸어갑니다. 20분 걸어야 하는 거리를 10분 만에 달려서.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어렸을 땐 안심해도 괜찮은 시간이 하루에 두 시간은 족히 넘었다면, 요즘은 안심해도 괜찮은 순간을 1초라도 찾기 어려워요. 그래도 영화관 안마 의자에 앉아 생각합니다. 1초라도 괜찮구나. 딱 1초만 풀어질 수 있대도 넉넉한 마음으로 어디로든 갈 수 있구나.
하루하루 완전히 깨어 있는 연습을 해야 하는 우리에게 매일 딱 그 1초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몽롱할 자유, 1초의 평안.
살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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