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주 목요일 중학생 아이들의 세계에서 시간을 보낸다.
중학생과 초등학생 대상의 작은 보습 학원, 그곳의 국어 선생으로 일한다.
그들에게 나는 만만한 선생이고, 아이들은 나를 중학교 3학년 선배쯤으로 대우한다.
중학교 1학년 남자애들은 감추는 게 없다. 그들은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않는다. 적어도 나처럼 만만한 선생 앞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중학생 아이들의 말 습관은 사회의 습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학원에는 게이 찐따라고 불리던 남자애가 있었다. 그 애는 당연하게도 아이들이 지어준 별명에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애는 수업 중간에 싯-팔이라는 욕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그 애를 보면서 “욕하지 마”하고 말하면 나를 독기 어린 눈으로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는 남자아이들과 함께 사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가오를 본받았다. 선생 앞에서 보이는 반항적인 행동만큼은 위력이 센 가오는 없었다. 하지만 한 남자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찐따가 가오 부리면 못 써. 멋이 다 달아나.” 그 애는 어느 날부터 남자아이들과 함께 사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는 약자다. 나는 중학생 시절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의 낭만화는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에게 중학교는 살아남기 위한 정글이었고, 친구도, 애인도 전략적으로 사귀어야 했다. 하지만 중학교 바깥으로 나오면 더 위험하다. 가족들은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고, 학원에서 선생도, 음식점 아줌마도 걸핏하면 나를 무시한다. 학교라는 내부 공간도, 그 바깥의 외부 공간도 안전하지 않다. 끊임없이 소속되기를 강요당하고, 낙오되면 아이의 세상은 무너진다.
하지만 어린아이인 동시에 여자라면 어떨까. 나는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중학생 여자아이들, 내 학창 시절과 닮은 표정을 짓는 여자아이들을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다.
누군가는 말한다. 세상은 변했고, 남녀는 평등해.
하지만 내가 학원에서 본 현실은, 14살 남자아이들의 적나라한 언어로 엿본 민낯의 세계는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10년 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다.
중학생 시절의 자위행위는 건강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곪은 건 성적인 걸 말하는 방식이다.
학원 남자아이들은 늘 자위를 연상시키는 말을 한다. 몽정과 일본 섹스 비디오, 19금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한다. 그럼 여자아이들은 못 들은 척하거나 주눅 든 표정으로 조용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다.
남자아이의 자위와 커다란 고추를 자랑하는 일이 모두가 들어야 하는 재미있는 농담거리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찾고 싶다. 남자애들은 고추를 자랑한다. 고추를 드러내고, 남자라는 자신의 성별을 만천하에 선보이고 싶어 한다.
반면 여자아이는 어떤가. 여자아이가 되면 가슴을 가리는 일, 생리대를 몰래 숨겨서 화장실에 가는 일부터 교육받는다. 여자아이의 신체 변화는 부끄럽고, 숨겨야 할 일이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여자아이 중 그 누구도 자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뒤 여러 사람이 자신의 중학생 시절 자위에 관해 이야기해줬다. 말을 하지 않을 뿐 나랑 가장 친하던 그 애들도 다 자위를 했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나도 중학생 때 자위를 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자위한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나는 타락한 걸레로 소문날 거라며 두려움에 떨었다. 여자아이의 자위는 조리돌림당했을 것이고, 여전히 그렇다.
학원 남자애들은 ‘걸레’라는 단어를 쉽게 뱉는다. 중학생이 되고, 남자를 10명 사귀었다는 이유로, 연애 중 다른 이성과 밥을 먹었다는 이유로 그 여자아이는 쉽게 걸레라 표현됐다. 너무 쉽게 ‘불순한 아이’가 된다. 반면 남성인 본인의 여성 편력은 인싸의 상징이라 치부한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연애를 못 해본 아이를 ‘고자’라고 부르는 것도 여전하다.
아이들은 여전히 니 엄마~라는 욕을 썼다. 10년 전에도 썼던 욕을 여전히 쓴다.
학원 아이들은 여기서 한술 더 뜬다.
니 엄마~ 하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니 엄마 김치찌개 잘 끓인다, 고 말하고 키득거린다.
그럼 옆에서 다른 남자아이가 최고의 칭찬이라고 킥킥댄다.
왜 니 아빠~가 아니라 니 엄마~일까. 여성은 왜 쉽게 모욕당할까. 어째서 김치찌개를 잘 끓인다는 것이 여전히 여성에게 최고의 칭찬이 되는 걸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중학생 때 들었던 말을 여전히 기억한다.
너도 피 싸?
그 남자애가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애의 표정과 말투, 목소리를 또렷이 전부 기억한다.
기회가 된다면 그 애에게 다시 말하고 싶다.
응 나 피 싸. 그래서 여전히 한 달에 한 번 생리통에 시달리고, 응급실에 가. 나는 여전히 편의점에서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히 생리대를 사고, 생리대를 쓰는 것마저 환경파괴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생리컵을 자궁에 깊숙이 끼워 넣었다가 말도 안 되는 고통을 느꼈어. 나는 여전히 피를 싸고, 그래서 빈혈에 시달리고, 한 달에 한 번 피를 싸는 건 완경 전까지 내 삶의 가장 큰 고통이 될 거야. 넌 그런 일을 어떻게 농락할 수 있지?
어쩌면 나는 중학생 시절 정리되지 않은 마음의 분풀이를 중학생들이 그득한 이 학원에서 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도저히 남자애들에게 무시당하는 여자애들을 가만 보고 있지 못한다. 분노하고, 한편 두려워한다.
나는 기억한다. 어린 시절 남자아이의 말 한마디가 나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는지. 아줌마 같다는 말을 듣고 그날 저녁 좋아하던 가디건을 버렸다. 닌자 같다는 말을 듣고 헤어스타일을 바꿨다. 맘모스 같다는 말을 듣고 살을 뺐다.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권력 그 자체였다.
이런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지겨울지 모른다.
하지만 몇 번이고 반복해도 중학생 여자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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