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죄송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 이 편지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독자분들은 저의 할 말 없음 상태의 글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할 말 없음에서 시작해 뭐라도 말함 상태로 끝나는 글.
그런 여백 많은 글이 여러분에게 생각할 거리를, 답장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일까요?
혹은 저의 아무 말이 가장 솔직하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다행이라고 생각 중입니다.
한 주간 저는 말이 참 무섭다고 생각했어요.
오래전에 오마르인가 무려 5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의 콘텐츠를 본 적이 있는데 그는 거만하게 의자에 앉아서 이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인데~로 시작하는 말을 해요.
“쉬지 않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취약점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위해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게 영상의 요지였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 없는 사람이 되라는 거예요.
나는 그의 말이 너무 싫어서 눈살을 찌푸렸어요. 동시에 그의 말을 공감하기도 했어요. 그는 침묵을 지키지 않아서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이런 미움도 사는구나.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어릴 적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해 냈어요.
여자애는 자고로 당당해야 해. 대신 침묵을 지켜라.
나는 이왕이면 침묵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말하지 못한 건 글로 썼어요. 글은 또 다른 말에 불과하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지난 2년간의 침묵 생활이 막을 내리고, 나는 사람들을 만나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침묵을 깨고, 말을 배우는 일이란 막 옹알이를 하는 갓난아기의 설렘과 대척점에 선 감정을 느끼게 했어요. 불쾌감.
말을 하기 싫다.
타액이 입안에 진득하게 늘어 붙어 내 말하기를 방해하고 있어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강력 접착제가 되어 내 다리와 팔을 옥죄고, 결국 아무것도 손 쓸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요.
학원에서 중학생 아이들에게 말을 할 때, 아이들은 나의 ‘말’을 따라 해요.
“책 펴어”
“조용히 해애”
“자리로 돌아가아”
남자아이가 과장된 표정으로 내 목소리를 따라 하는 걸 볼 때면
내 말을 남의 입을 통해 들을 때면
내가 저런 말을 하는구나,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말이란 내 무지와 오만과 허세를 직면하게 하는 일.
나에게 말이란 남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되풀이해 듣는 일.
내가 한 말은 내 몸에 문신처럼 남아요.
나는 이미 지나가 버린 말을 곱씹고, 또 곱씹고, 내 말을 바라보고, 또 바라봐요.
요즘은 생활이 귀찮다고 생각합니다.
여름이니까요.
덥고, 찐득거리니까.
비 오면 우산을 찾아 쓰는 일, 밥을 짓고, 밥을 먹는 일, 빨래를 개고, 청소기를 돌리는 일. 그리고 죽은 크림이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일.
몇 주째 혼자 몰래 울었는데 이젠 다른 사람 앞에서도 크림이를 생각하며 울게 되었거든요. 나는 공원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고양이들을 볼 때도, 남의 집 강아지 사진을 볼 때도, 강아지 짖는 소리를 길거리에서 들을 때에도 슬퍼집니다. 남에게 보일 수 있는, 들킬 수밖에 없는, 오래 지속되는 무언가는 생활이 맞겠지요.
크림이의 죽음에 대한 나의 슬픔은 이제 생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 매일 같이 말하는 일도 나의 생활이 되었습니다.
생활이란 뭐가 이렇게 어렵고, 귀찮고, 힘든 것 투성이일까요.
나는 오늘도 이렇게 편지를 써서 말을 하고, 내일도 사람들을 만나 말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심지어 며칠 전에는 유튜브에 20분 동안 말만 하는 영상을 찍어 올렸네요. 수백 단어를 마구 뱉어냈겠죠.
올여름 나의 생활은 단순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이 덕지덕지 붙어 끈적한 몸이 싫어요. 내 생활이 복잡한 건 나의 말 때문이에요. 나의 말이 나를 잡아먹고 있어요.
살살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