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수업에 들어가자마자 선생은 나를 정중앙에 세워 놓았다. 나는 잔뜩 겁을 먹고, 사람들의 질문을 받았다. 선생은 얼굴을 쭉 빼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무례하다고 느껴지는 그의 눈빛을 부러 피하지 않았다. 그는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질문!"
그들은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 이렇게 폭력적일 수 있다니. 나는 연극 수업을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대 위에 서서 최대한 긍정적이고, 쿨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인 척 굴었다. 나는 처음 본 사람들 앞에서 늘 그런 모습만 보인다.
자기소개가 끝난 뒤 다섯 명 남짓의 사람들은 돌아가며 무대에 올라 2분 연기를 펼쳤다. 선생은 그들의 연기만 보고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다 안다는 듯이 굴었다.
"너는 원래 사람들 눈치 많이 보지?"
"아 너는 상처를 받기 싫어서 화를 내지?"
나는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앉아 선생의 말을 아니꼽다는 듯이 들었다. 이건 뭐 연극 치료 같은 건가? 연극 치료면 좀 더 다정한 말투로 할 수 없나? 왜 다 아는 척이지?
하지만 수업 내내 선생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의 무례한 말투는 여전하지만) 이 수업의 목적, 더 나아가 연기의 목적을 알 것도 같았다. 그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이런 말을 외쳤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냥 말해. 말을 해."
선생은 연기 수업에서 되려 ‘연기하지 말기’를 강조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2분 연기를 펼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 오르며 번뜩, 내가 적어 놓은 희곡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선생은 내게 일상에서 있었던 일을 재연하라고 요청했지만 나는 내가 떠올린 대본 속 그 장면을 지금 당장 연기해야만 할 것 같았다.
마스크를 벗고, 사람들이 처음 무대에 올라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풀고 팔과 다리를 자연스럽게 움직여 보았다. 무대 아래에서 나를 빤히 보는 선생과 사람들을 내려봤다.
나는 전혀 떨고 있지 않았다. 발표할 때도, 사람들 앞에서 몇 마디 말을 할 때도 긴장하던 내가 무대 위에 섰는데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느낀 감정은 오직 분노뿐이었다. 무례한 선생과 그 옆에서 선생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그들에게 화만 남은 상태로 첫 문장을 뱉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도 집에 갈 수 없어.
분노가 가득한 상태로 말을 하는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내가 쓴 대본 속 그녀는 지금 화를 죽이고, 마음을 다스리로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내 고향은 청주야.
청주에는 우리 엄마랑 루이가 살아.
루이는 길에서 살던 애야.
지난해 겨울이었나. 엄마는 비에 쫄딱 젖은 루이를 데리고 와서 말리고, 먹이고, 입혔어.
루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남자애였어. 엄마는 루이가 좋대. 루이가 아빠랑 닮아서. 나는 같은 이유로 루이가 싫어.
끔.찍.하.게.싫.어.
이상한 일이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채로 감정을 삼키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것은 내가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내가 만든 그녀가 흘린 눈물이었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기 시작했어.
요즘 루이는 유튜브에 먹는 영상을 찍어 올려. 우리 집 자그마한 밭을 배경으로.
솥뚜껑에 삼겹살을 두 근, 세 근 구워서 그걸 게걸스럽게 입안에 욱여넣어.
영상에는 가끔 우리 엄마도 나와. 나는 아주 멀리서도 우리 엄마를 볼 수 있어.
영상 속에서 루이가 엄마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엄마
엄마
엄마
내 고함은 관객석에 윙윙 울려 퍼졌다.
내가 언제 이렇게 큰 소리를 내봤더라. 몸 안에 언제 정체 모를 분노가 꿈틀대고 있었다. 찌꺼기들이 분출되고 더러웠던 몸이 깨끗해진 기분이었다.
그럼 엄마가 접시에 김치랑 콩나물 따위를 올려서 막 달려와. 솥뚜껑 위에 그것들을 올려. 그럼 루이는 그걸 또 게걸스럽게 입안에 욱여넣어.
그러니까 나는 충주에는 갈 수 없어.
나에게는 집이 필요해.
독백이 끝난 뒤 관객석은 조용했다.
순간 긴장이 밀려왔다.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선생은 예의 진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상 연기를 하라고 했지? 왜 네 멋대로 바꿨어?"
나는 대답했다.
"그냥요."
원래의 나였다면 비실비실 웃으며 죄송해요, 라고 말했겠지.
선생은 비웃듯이 킥킥거렸다.
"야 너는 잘한다. 무대를 장악했어. 그 누구도 아니고 너였어. 다음에도 잘할 수 있겠니?"
"아니요."
"왜지?"
"이건 제가 쓴 글이니까 제가 가장 잘 읽을 뿐이에요."
나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전화벨 소리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건 몇 달 전부터다. 전화벨 소리가 들리면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 전화를 기쁘게 받아야 할텐데 내가 그러지 못하면 어쩌지.
나는 언제 만나도, 언제 전화를 받아도 기쁘고, 활기차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비슷한 이유로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친구 림은 그럴 때는 상황마다 서로 다른 페르소나를 만든다면 견딜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이를테면 나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동체에서는 귀엽고 눈치 빠른 막내 역을 자처하는 식으로.
"나는 그렇게는 못 해."
내가 말했다.
"왜?"
림이 물었다.
"넌 원래 어떤 사람인데? 연기를 하지 않을 때 너 말이야."
"그건 그냥 나지. 넌 뭔데?"
"글쎄…"
"그걸 알아야지."
그때 알았다. 나에게는 처음부터 진짜가 없었다. 내가 진짜라고 믿던 모습조차 연기였을 뿐이었다. 나는 일상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상상해 놓은 틀 안에 나를 가두고, 그렇게만 행동하도록 조종하고 있었다.
선생이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스크를 벗었다. 선생의 마스크를 벗은 모습이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우리는 상황에 들어가서 그냥 제대로 놀려고 여기 오는 거다.
그냥 이 순간에서 놀아.
다음 주에 보자!"
나는 그동안 작은 상자에 갇혀 있었다. 그날 연기 수업에서 나는 최초로 상자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나는 다 얻은 기분을 느꼈다. 내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그것. 처음 보는 얼굴, 진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살살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