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첫 문장부터 재미없다고 스크롤을 쓱 내리지 말아 주세요)
요즘은 많은 것들이 뻔하게 느껴져요.
마치 오래전에 한 번 겪어본 일상이 반복되는 것처럼요.
다시 태어났거나, 다시 태어날 삶을 반복하는 기분.
이 기분은 벌써 여덟 달째 반복되고 있어요.
GD의 아주 오래전 인터뷰를 읽었어요.
삶이 너무 화려해서 지금 이생이 꿈같다고, 그는 말했어요.
(언젠가의 나처럼)
감탄할 순간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사람들, 일상의 조각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것들을 남들의 두 배로 느끼는 사람들이 부러워요.
쉽게 분노하는 사람들, 술을 마시고 한참 욕설을 토해내는 사람들, 다 게워내는 사람들이 부러워요.
이 모든 게 열정이라는 두 단어로 설명될 수 있다면,
나는 열정이 없는 사람.
이생이 너무 지겨워서 재밌는 걸 찾으려고 책이나 읽어요.
이생이 너무 지겨워서 글이나 써요.
아, 재미없다.
재미가 없어서 눈물이 다 나네.
앞구르기 하면서 세상을 보면 하루하루가 새로울 거라고 생각해요.
앞구르기든 뒤구르기든 구르기 테스트에서 체육 점수를 다 깎아 먹어 버리던 나는 이렇게 커서도 구르기 능력이 0에 수렴해요.
그런데 구르기 잘하는 척, 뭐라도 되는 척 쓰는 살편살지는 참 재미없어요.
무뼈 워딩을 쓰라니.
세상에.
너무 가식적이야. 나는 종일 뼈 있는 생각만 하고, 뼈 있는 말만 해요. 에세이 작가들은 구회하긴 하겠죠? 나는 못해, 나는 포기요.
보는 사람도 몇 안 되는 이 편지에서조차 가식을 떠네요.
한 지인은 말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살편살지를 단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어. 이런 거엔 솔직한 게 좋잖아.”
또 한 지인은 조금 미안해하며 말해요.
“사실 나는 남들 블로그 글도 대충 읽어. 대충 쓱 스크롤만 내려.”
당신도 지금 쓱 스크롤을 내리거나 편지를 열어 보지도 않았겠죠. 원망이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뿐입니다.
어차피 썩어갈 글에 나는 왜 가식을 떠나.
남들이 찾아주는 글을 쓰고 싶었어요.
그런 게 돈이 되니까.
나도 돈 되는 글을 쓰고 싶어요.
그래서 요즘은 카피라이터가 되기 위한 수업을 들어요.
그곳에서 들은 인상적인 문장.
“예술은 표현이고, 카피는 배려야.”
나는 배려를 연습하기로 해요. 살편살지를 쓸 때는 배려만 하기로 다짐해요.
10명 혹은 20명의 독자에게 배려만 하기로.
내 이야기는 지겹고, 이런 한탄은 우울하죠. 그런 건 없는 것처럼 도려내기로 해요.
0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에요.
나는 무엇이 되려고 했을까요.
배려인이 되려고 했을까요.
직업인이 되려고 했을까요.
아, 알았다.
나는 자가 소유인이 되려고 했어요.
카피라이터가 되어 400만 원의 급여 중 200만 원을 저축하는 상상을 해요. 4년이 흐르면 1억이 모여 있겠네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남들이 공감할 만한 글을 쓰는 자질이 없구나, 깨달았어요.
게다가 학점도 없고, 토익 성적도 없고, 이렇다 할 자격증과 스펙도 없구나.
카피라이터가 될 수 없어요.
나는 자가 소유인이 될 수 있을까요.
나는 무엇이 되려고 했을까요.
0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
며칠 전에 남양주에 있는 현대아울렛에 갔어요.
내 발길은 결국 8세컨즈로 향해요. 다른 곳의 옷들은 다 너무 비싸서.
옷 몇 벌을 챙겨서 탈의실로 들어가요.
문을 잠그고, 옷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하니까 내 몸이 보여요.
허벅지의 튼살과 팬티 자국이 남은 볼록 나온 배, 둔한 팔뚝, 커다랗고 못생긴 가슴.
아, 세상에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내 몸은 무 같아서.
나는 주저앉아 거울을 등지고 내 몸을 끌어안아요.
제발 아무도 나에게 운동이나 지방 이식을 하면 되겠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내 몸을 좋아하지 못하고, 운동도 좋아하지 못하고. 그냥 왜 이렇게 태어났나 생각해요. 그러니까 제발 남들이 나를 나처럼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종종 내 몸과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척 구는데 실은 대부분 거짓이에요. 매일 달라진다고,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나는 실은 여전히 똑같아요.
동행인은 말해요.
“너를 기다리며 거울에 비친 나를 봤는데 이런 생각을 했어.”
“어떤 생각?”
“내가 이 젊은 나이에 너무 빨리 ‘미’라는 중요한 가치를 포기해 버렸다는 생각. 나는 너무 내려놨어. 이제 더이상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아. 이것 봐. 못 늘어난 티셔츠와 프리 사이즈 조거 팬츠. 난 사실 이 옷들도 불편해.”
“우리는 포기했지만 포기하지 못해서 이곳에 왔네.”
동행인과 나는 8세컨즈를 걸어 나와 폴로에 향해요.
동행인은 셔츠가 15만 원이라면 구매하겠다고 해요.
“조금 더 불편해져 볼게.”
그녀가 말해요.
그녀가 집은 셔츠는 정확히 15만 9천 원.
그녀는 셔츠를 입어 보고, 다시 내려놔요.
9천 원이 더 비싸니까 그런 거겠죠.
폴로 매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들은 우리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은 나이예요.
그들은 셔츠를 아무렇지 않게 사네요.
나는 돈은 있는데, 가난한 사람이 되어 있어요.
우리의 욕망이 거대한 샘이라면 동행인과 나의 샘은 얕고, 얕겠지요.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린 점점 더 가난해지는 거야.
그러니까 추구해. 그거라도 추구해.
“쇼핑백 들고 있는 사람들 부럽다.”
우리는 같이 고개를 끄덕여요. 우리의 얕은 욕망 샘에는 예쁜 옷을 발견한 뒤 구매할 욕망이 없어요. 단지 우리는 마음에 드는 옷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하기로 해요.
동행인과 나는 백화점 안에서 그들의 욕망을 삼켜요.
그 욕망을 삼켜야만 옷을 위해 돈을 모으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관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는 무엇이 되려고 했을까요.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수강생들에게 늘 반복해 하는 말.
“인물에게 ‘욕망’을 부여해. 세상 사람들을 구경해봐. 다들 하나쯤 욕망이 있잖아. 욕망이 있는 인물만 생동해. 그러니까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주인공에게 꼭 그들만의 욕망을 부여해.”
한번은 한 수강생이 이렇게 물었어요.
“선생님 욕망을 찾고 싶은 게 욕망인 인물을 쓰면 안 되나요?”
나는 그때 왜 안 돼, 단언했을까요. 왜 그런 욕망은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사실 나는 이제 어떤 욕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열정이 없어요.
나는 분노하지 않고, 즐겁지 않고, 흥분하지 않고, 이렇게 잠잠해요.
마음이 잠잠해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다행히 조금은 슬퍼졌어요.
글을 쓰며 앞구르기를 반쯤은 성공했는지 모르겠어요.
찾아볼게요. 내가 무슨 욕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되려고 했는지.
내가 편지를 쓰며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살살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