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주 풀이와 테라피 세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활동이 어떻게 이어지고, 엮이고, 제 마음속에서 작용하였는지를 파헤치다보면 결국 희망에 대해 말하게 될 것 같은데요.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함께 지켜봐 주세요.
얼마 전 전화로 제 사주 풀이를 들었습니다. 일명 ‘전화 사주’라는 것인데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사주, 신점, 타로 같은 것에 돈을 써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주 특별하고 생소한 경험이었습니다.
전화 사주는 충동적으로 당일 예약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예약한 뒤의 마음이란
“이거로구나!”
이것이 내 삶의 방향성에 약간이라도 해답을 내려주겠구나, 그런 확신에 차 있었고 기뻤습니다.
전화 사주까지 남은 3시간, ‘사주 뽕뽑기 질문’ 같은 것들을 확인하며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 다음과 같은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네요.
주식 시작했는데 괜찮을까요?
차 지금 사도 될까요? 사고 안 나나요?
애인과 나의 궁합은?
부모님 건강하실까요?
이사하려고 하는데 어떤 지역이 좋을까요?
워홀 갈까요 말까요?
뭐야. 쓰다 보니 뭐 이렇게 내 삶에 가능성과 걱정거리가 많은지, 그걸 구구절절 나열하고 답을 구하고 있자니 나라는 사람이 너무 하찮아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괜히 얼굴도 모르는 그에게 나의 운명을 맡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간절해졌습니다. 나는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요.
전화 사주는 오후 9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동거인과 저는 서로의 사주풀이를 함께 듣고, 기록해 주었습니다. 동거인의 사주는 제 입장에서 약간 부러운 내용이었는데 특별히 그녀가 38살 이후로는 ‘작가’ 일을 하게 될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 사주는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4월, 봄에 태어났으나 태어났을 때부터 꽃을 피우지 못했다고 했으며 32살 무렵 인생이 풀릴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은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렸다고 했습니다. 또 동남아에서 살면 인생이 몇 배 더 잘 풀릴 거라는 말을 더했습니다.
노력하면 인생이 풀릴 거라는 하나 마나 한 당연한 소리를 하는 데다 창작하는 일이 잘 맞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죄도 없는 그가 괘씸하게 느껴졌습니다.
이토록 그의 사주 풀이에 집착했던 이유는 도저히 찍어 맞출 수 없는 저의 가족사를 그가 매우 정확히 맞췄고, 저는 기함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이 맞다면 나는 사주대로 살게 될 거라는 어떤 확신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습니다.
한편 고작 동거인의 사주 하나에 질투심을 느끼는 내가 너무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다 뭐라고.
정말 불쾌한 상황은 그 이후에 펼쳐졌습니다.
그의 사주풀이가 끝난 뒤 저는 미리 준비해 둔 질문들을 여러 개 그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질문들이란 사주 해설가인 그가 도저히 답할 수 없고 해결을 내릴 수 없는 종류의 것이 맞습니다. 다만 이전의 사주 풀이 과정에서 그가 내 삶을 단정짓듯이 난도질 해놨기 때문에 이 정도 질문을 못 할 게 또 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애인과의 궁합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였을 겁니다. 그는 너무 많은 질문에 지친 것인지, 원래 좀 무례한 사람인 건지 사주라는 핑계를 삼아 나를 조곤조곤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진씨 같은 사람들은 (어쩌구) 사주이기 때문에 사이비 같은 것에 잘 걸릴 수 있어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 말을 듣자마자 확실히 ‘아시겠’더군요. 그는 내가 자신에게 결정을 의탁하고, 마음을 기대려 한다고 생각했구나. 그리고 그런 나를 나약한 존재로 단정지으려 하는구나. 그는 나를 가르치듯이 말하기 시작했고, 나라는 사람의 특성을 다 안다는 듯이 굴며 나에게 ‘운명’이란 무기로 겁을 주고, 자신을 우러러보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나는 그만 전화를 끊고 싶어 입을 다물고, 대충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 첫 전화 사주를 다 끝낸 뒤 저는 녹초가 되었고, 깨달았습니다. 지금 나에게는 내 불안한 삶의 비빌 언덕이 필요했구나. 그것이 “몇 년 뒤의 너는 잘될거야” 말해주는 무용하디 무용한 사주 한 문장일 뿐일지라도.
*
한 주 전 테라피 세션에 처음 방문해 상담 선생님을 만나고 온 뒤에도 저는 전화 사주를 끝마친 그때 딱 그 기분으로 녹초가 되었습니다.
대학에서 무료로 진행하던 상담 회기가 ‘졸업자’란 이유로 끝났고, 나라에서 청년에게 무료로 지원하는 5회기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두 달의 기다림 끝에 저에게도 상담받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 기회를 간절히 기다리고, 붙잡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
“죽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자꾸 힘들고, 기력이 없는데 상담 선생님이라도 만나면 좀 괜찮지 않을까, 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상담을 받을 때는 내 고민과 생각, 마음을 빠짐없이 털어놓고,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어 심리 상태가 호전되곤 했습니다.
연신내에서 열차를 한 번 갈아타고, 1시간 걸려 노량진까지 가서 상담 선생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녀는… 죄송하지만 너무나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녀가 내게 잘 맞지 않는 상담 선생님인 건지, 그녀가 약간은 무능한 상담 선생님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의 의지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태도와 말이 저를 더 불안하고,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유진씨 정도면 우울한 건 아니에요. 이렇게 꾸미고 바깥으로 나오셨잖아요.”
“네. 그런데요 선생님 그럼 제 상태는 왜 이럴까요.”
“가장 불편한 게 무엇인가요?”
“우울감과 불안이 2년이나 지속되었고, 이 감각 때문에 이전보다 일의 능률이 현저히 떨어졌어요.”
“그러시군요. 그런 경우엔 약을 처방할 수 있는데 그 정돈 아닌 것으로 보이고.”
“…”
“일 할 때 집중이 어려우세요?”
“예”
“그럼 집중을 좀 끊어서 해보시면 어때요? 30분 집중하고, 그 이후론 집중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집중이 오면 집중을 하시고.”
“…”
나에게 필요한 건 나의 얘기를 들어주는 타인, 그게 전부였나 봅니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더라도, 내가 왜 이런 상태일 수밖에 없는지 스스로 납득 가능할 수 있도록, 내 감정의 문제 이유를 ‘나 혼자’ 찾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수학 공식처럼 문제가 해결 됐다면 나는 왜 근 몇 년 간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을까요.
이전에 나를 상담해주셨던 선생님이 무척이나, 과할 만큼 유능한 분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세션 내내 대부분 가만히 들어주시다 정확하게 필요한 질문을 던져 내 안의 몰랐던 이야기를 끌어내 주셨고, 내가 언어화 할 수 없는 감정과 상태를 적확한 단어로 표현해주셨거든요.
새로운 선생님과의 두번째 상담을 끝으로 저는 상담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무료로 심리 상담을 받을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대로 원치 않은 조언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녀가 묘하게 계속 강요하는 삶의 방향성(글쓰기는 미뤄두고 취직을 하는 게 어떠냐는)을 계속 듣다 내가 정말 그녀의 말에 휘둘리게 될까 걱정이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입니다.
상담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은 저에게 희망을 끊어내는 경험이었습니다.
‘상담 받고 나면 괜찮아 질 거야.’
믿었고, 기대했지만 상담은 생각보다 위대한 해결책이 아니듯이, 가끔 나는 무언가로 포장된 희망 때문에 오히려 낭패감을 견뎌야 합니다.
요즘의 저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희망을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제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이렇게 살아도 되나요?”
“나 괜찮을까요?”
사주 해설가에게라도 기대고 싶은 연약한 마음으로.
그만큼 나의 삶을 변화시킬 무언가가, 기분을 나아지게 해줄 한 가지가 꼭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뭔가가 채워진다고 해서 나의 삶이 달라질까요. 희망이란 건 처음부터 환상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사실 요즘의 내가 기대어 있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오로지 나의 몸.
어제 내내 생리통에 시달리며 침대에서 시름했지만 오늘은 다시 벌떡 일어날 수 있는 위대한 회복력.
이것이 유일하게나마 간절히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한 가지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