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망원 사는 척’에 푹 빠져 있다.
‘척하기’는 나의 몇 없는 악취미 중 하나이다. 비밀스럽기에 가장 재밌는 놀이이기도 하다.
시기에 따라 나는 서로 다른 나를 연기하며, 다시 말해 ‘척’을 하며 지내왔는데 밥 많이 먹는 ‘척’하기, 한예종 학생인 ‘척’하기, 다독가인 ‘척’하기 등에 진심으로, 열정적으로 임해왔다.
척하기의 양상을 보면 그 시기 나의 가장 핵심적인 욕망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다.
얼마 전 은평구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은평구에 살고 싶어 은평에 집을 구한 것은 아니다. 나는 망원동에 살고 싶었고, 하지만 망원동 집은 월세가 상당했으므로 망원역 6호선으로 한참 거슬러 가면 나오는 은평구에 터를 잡게 되었다.
나는 왜 망원동에 살고 싶었을까. 그 욕망의 근원을 묻는다면, 나는 망원이라는 동네가 풍기는 어떤 페미니즘과 퀴어, 예술 그것들이 마구 뒤섞인 향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고 얼버무리겠다.
이런 나의 취향은 그닥 맘에 들지 않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소 부끄럽기도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런 마음을 말한 적은 없다. 어찌 됐든 다채로운 여성들이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더 좋은 친구를 사귀고, 원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 같다. 그게 뭐 어디 처음부터 가능하긴 한 일인지 모르겠다만.
하지만 본래의 이러한 욕망은 진작에 흐려졌고, 나는 그냥 망원이 좋았다. 서울에 정 붙일 동네 한 곳은 필요했고, 나에게 망원은 딱 그런 동네였다. 망원이라도 좋아해야 서울을 덜 미워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
나의 척스런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바쁘게 생활한 뒤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다. 주로 노출이 있는 운동복을 즐겨 입는다. 이것을 척업복이라고 부르겠다. 가방은 챙기지 않고 책 하나를 달랑달랑 들고 나간다.
망원에 도착하면 저녁 7시가 넘는다. 나는 망원시장과 근처 골목을 약 30분 거닌다. 망원 30분 거닐기는 내가 이 피곤한 몸을 꾸역꾸역 이끌고 이곳까지 온 진짜 이유다. 나는 가방을 들지 않았고, 운동복을 입었으므로 어쩐지 망원동 주민처럼 보인다. 이 기분이 나를 신나게 한다.
나는 내가 정말 망원에 사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세뇌한다. 다른 이들에게도 내가 망원동 주민처럼 보이길 바라며, 의식하며 걷는다. 한편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쓴다.
얼마쯤 걷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가 있으면 들어간다. 커피를 즐기며 책을 조금 읽는다.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책 따위가 아니라 망원동 주민이라는 가짜 정체성을 지닌 나,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 역할에 집중해 보려 한다.
값싸고 즐거운 ‘망원 주민 되기’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단연 망원유슈지 달리기이다. 들고 온 책을 농구 코트에 대충 던져두고 나는 트랙을 달리기 시작한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나의 앞을 달리는 사람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코트를 내달린다. 역시나 이 시간에는 풋살장에서 여자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나는 이 시간에 망원유수지를 달리며 바로 이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인스타그램 속에 가짜 나를 전시하면 불행해질 뿐이라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나는 지금 이 순간 가짜인 내가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벅차게 좋아! ‘망원 주민’으로서 저녁 달리기를 하며 나는 오늘 하루 중 최고로 행복하다.
오래 달리지는 않는다. 적당히, 내 행복감을 망치지 않을 정도로만 트랙을 돈다. 버스를 타고 인스타그램에 망원 트랙을 달린 내 모습을 잊지 않고 전시한다. 가히 환상적인 저녁 시간이 아닌가.
이 척하기라는 취미 생활을 과연 누가 무의미하고, 유치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언젠가, 그러니까 내가 한창 예술학교 학생인 ‘척’을 하던 시절에 나는 한예종 근처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근처 카페를 갔고, 밥을 먹고, 한예종 다니는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우연히 한예종 근처의 작은 미용실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최대한 독특한 머리 스타일을 시도하고 싶었다. 그것이 한예종 학생인 ‘척’ 하고 있는 나에게 가장 어울릴 것 같았다. 미용실 사장님은 자연스럽게 내게 질문을 던졌다.
“대학생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짐짓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네 여기 한예종 다녀요.”
그 말을 뱉고 난 뒤로 마음이 급격히 푹, 하고 가라앉았다. ‘척’이 진짜가 되는 순간, 이토록 허무하고 별거 없는 일이었다니. 말 한마디에 나는 한예종 학생이 되어 있었고, 모든 게 쉽고 명쾌하고 단순해서 속상해졌다. 미용실을 걸어 나오며 내가 정말로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저 간절하게 나의 욕망을 쫓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생기 있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그 근처에 있고 싶어 하는 솔직한 마음이 나를 즐겁게 했다.
나는 롤스로이스를 욕망하는가? 번듯한 전문직을 욕망하는가? 아니. 나는 내 삶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의 소소하고, 쓸데없는 것을 욕망하고, 그것 가까이에 있기 위해 나의 생활을 재배치한다. 대체로 거짓이거나 가짜일지라도, 나는 부지런히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해 간다.
‘간다’라는 단어로 끝맺는 문장은 참 산뜻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나를 추동하는 이 이상한 취미생활을 아직은 그냥 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