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이 글을 씁니다. 식빵 한 쪽을 에어프라이어에 구워 크림치즈를 발라 아침으로 먹었습니다. 똑같은 아침 식사를 일주일째 먹고 있습니다. 매일 일관적인 기상 시간과 아침 식사, 그런 것이 즐겁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이 주 전부터 매일 아침 전화영어를 합니다. Amy와 나누는 30분의 대화는 대체로 Amy가 새로 구성한 소설의 줄거리에 대해 떠들다 끝납니다. 필리핀에서 한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한 경험이 있는 Amy는 필리핀 사람들이 로맨스 소설만 주구장창 읽고, 그 유행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며 한탄합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의 영원한 베스트셀러는 자기계발서라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것에 대해 한 마디도 한탄하지 않습니다. 나는 유행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Amy가 새로 쓰는 소설은 책상에 대한 것인데 책상에 매일 똑같이 올려져 있는 사물과 그 사물을 사용하는 서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쓴다고 합니다. 소설의 렌즈는 책상 위에서 단 한 순간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왜 Amy가 한 편의 소설밖에 발표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은 줄거리라고 나는 웃어 버렸고, Amy도 큰 새의 날갯짓 소리 같은 특유의 바삭바삭한 웃음소리를 냅니다. 우리에게 이런 말이 칭찬이라는 걸 Amy도, 나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그녀가 그녀의 부모가 사는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로맨스 소설과 그녀의 소설에는 서로 절대 붙을 수 없는 간극이 있고, 그래서 그녀는 필리핀의 작가로는 성공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Amy는 성공도 실패도 바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지 맛있는 밥과 오늘의 일, 그리고 아늑한 집, 그것이면 그녀는 충분합니다. 나는 거의 40살이 넘은 Amy의 낙천성에 매일 아침 나에게 꼭 필요했던 희망을 얻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지만 Amy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내가 쓰게 될(영원히 쓰지 않을) 가짜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그녀는 내가 두 권의 책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독립출판물이라고 말하기 싫어 그냥 출판사가 있다고 말해버렸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독립출판물의 독립성과 창조성을 존중합니다. 다만, 나는 그냥 출판사가 있는 작가가 되어보고 싶었습니다. Amy에게 국제우편으로 나의 책을 보내주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직 그 일을 미루고 있습니다.
오늘 그녀에게 나는 <작은 자유>라는 제목의 소설을 지어냅니다. 집도, 직업도 없는 한 여자는 500만원짜리 중고차 하나가 가진 것의 전부입니다. 그녀는 차를 끌고 한국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닙니다.
“왜 한국에서 인가요?”
Amy가 물었습니다.
“영어를 못해서요.”
나는 말합니다.
“전화영어를 하라 그러지 그러세요?”
우리는 또 낄낄댑니다. 그러게요. 영어를 잘하게 된 여자는 빙글빙글 그리는 원이 지금보다 훨씬 커지겠죠. 빙글빙글에서 뱅글뱅글로. 원의 크기가 두 배, 세 배가 되겠지요. 결국 돌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는데 그 원이 커진대도 뭐할까요. 전화영어를 해서 뭐할까요. 우린 서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도서관에 매일 매일 오는 것은 나의 작은 자유를 통솔하기 위해서입니다. 백수가 되어 넘쳐흐르는 자유는 줄곧 나를 전자파 쪽으로 끌어당기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억압돼 있던 불안이 급히 습격해 옵니다.. 생산성이라는 굴레 안에서 나는 쉽게 자유로워지는 대신 자유를 억압하는 쪽을 택하기로 합니다. 자유란 나에게 아직은 그런 것입니다. 힘을 줘 제압하고, 이왕이면 목까지 비틀어 숨도 못 쉬게 가둬 둬야 하는 것. 내보내 달라고 쾅쾅대도 단호하게 굴어야만 하는 작은 새.
하지만 매일 같은 시간, 도서관에 와서 공부를 시작하면 알 수 없는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이건 통제된 자유인데, 나는 여기 갇혀 있을 뿐이고, 이건 진정 내가 원하는 공부인지 확신이 서지도 않는데 나는 불안에 떠밀려 그저 여기 이렇게 왔을 뿐인데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 즐거울까.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보다 여기 그대로 있고 싶다는 안전한 감각과 함께라면 나는 앞으로도 꽤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믿기로 합니다.
2주 전부터 운전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왜 뭔가를 ‘시작’하면 ‘비장’해지는지 뭘 그냥 하는 법이 없고, 저기 한참 미래까지 내다보게 됩니다. 운전을 잘하게 돼서 세계일주를 해야지, 아 운전연수 강사가 돼도 좋겠다. 아니아니 여성 대리운전 업체를 창업해 볼까나. 운전을 지금 막 시작했는데 운전을 잘하게 되면,의 상황에 우선 몰두하고, 뭘 시작하면 무조건 남들보다 더 잘할 거라고 믿고, 그 기대가 좌절되면 그보다 몇 배는 더 좌절하는 내가 딱 싫어하는 내 성격 특성을 원치 않게 자꾸 마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나는 운전을 잘하는 편도, 못하는 편도 아닙니다. 대개 내가 하는 일들은 그러합니다. 늘 운전 연수 강사님 혹은 엄마가 옆자리에 동행해 내 운전을 봐주곤 했는데 며칠 전에는 온전히 홀로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캐스퍼를 끌고 연신내에서 망원한강까지 가보기로 합니다.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두려움은 잠시, 알싸한 긴장감을 온몸에 감은 채로 나는 도로에 나옵니다. 모든 것을 실수 없이 해내다 자동차전용도로까지 무사히 진입합니다. 도로에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이 구멍인지, 저 앞에 저 구멍인지 어디서 빠져야 하는지 나는 또 헷갈려 버렸고, 눈앞에서 한강이 멀어졌습니다. 네비는 금세 또 다른 길을 제시해 줍니다. 나는 그냥 도로주행 연습 중인 거야, 마음이 신나고 가벼워졌습니다. 운전을 하며 실수를 연습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웁니다.
나는 대교를 건너며 고개를 돌려볼 여유가 생겼고, 차창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한강이 아름다워서 막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왔습니다. 이 좋은걸, 남들만 했구나. 이 좋은 운전을. 그리고 또 나는 다시 구멍을 찾지 못했고, 홍제역 인근까지 자동차전용도로를 타고 달려와 버렸습니다. 유턴을 해서 똑같은 도로를 타고, 이번엔 실수 없이 구멍을 찾아 나오니 예상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망원한강에 도착했습니다.
길을 잃고 이리저리 돌아가도 목적지에는 결국 도착합니다. 목적지는 생각보다 춥고, 별 게 없어서 나는 한강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차에 올라 라디오를 조금 듣기로 합니다. 김신영의 라디오가 자동으로 재생됩니다. 박재범의 노래가 나왔다가 레드벨벳의 노래가 나왔다가 또다시 언제나 호탕한 김신영 목소리. 나는 한강공원에 주차를 해놓고 이렇게 앉아 있는 내가 좋아서 쉽게 행복해집니다. 야금야금 조금씩 돈을 모아 내 차도 사고, 가끔 이유 없이 목적지를 향해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조금씩 자유를 찾고 그래서.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게 해줄 사건, 그리고 배움은 사소하고, 자그마해서 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지 모릅니다.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잠시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