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나에게 변명하자면,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불청결하고, 무심한 브래지어 생활을 영위할 생각이 없었다. 엄마가 사주는 속옷 말고, 나만의 속옷을 찾기 위해 탐색하고, 구매했고, 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비싼 것이나 저렴한 것이나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빅가슴 브래지어의 디자인이다. D컵 이상의 큰 가슴을 위한 브래지어는 왜 디자인이 촌스럽기만 할까. 잔잔한 프릴이 달린 브래지어도, 잔꽃무늬 브래지어도, 민무늬 핫핑크 브래지어도 나는 선택할 수 없었다. 저것은 적당한 가슴 크기의 여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내가 가진 브래지어 디자인은 대체로 펑퍼짐하고, 어정쩡하고, 할머니들 것 같았다.
사실 디자인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괜찮다. 몸이 편하기라도 했다면 나는 브래지어 유목민으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 크기를 정확하게 재고, 백화점에서 구매한 가격대 있는 브래지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은 입으면 소화가 안 됐고, 어떤 것은 달릴 때 가슴이 덜렁거려 불편했고, 어떤 것은 브래지어 끈이 너무 두꺼웠다.
나는 도저히 브래지어와 친해질 수 없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니플패치를 붙이고 브래지어 없이 생활해보려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커다란 가슴이 브래지어 안에 고정되지 않은 채 옷 속에서 이리저리 꿀렁거리는 바람에 일상생활 중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두세 배로 불편했다.
어느 날 나는 운명처럼 브래지어 하나를 만났다. 결국 백화점에서 7만 원짜리 살구색 민무늬 브래지어를 구매했다. 이 브래지어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1. 어깨끈은 얇을 것.
2. 무늬가 없을 것
3. 편안하게 맞을 것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던 이 브래지어를 찾기까지 나는 너무 긴 시간을 돌아왔고, 그래서 감격했다. 나는 이것을 입기로 정했다. 이것만 입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브래지어 따위에 신경을 끄기로 했다. 다 지겨웠다.
여름에는 똑같은 브래지어를 일주일 내내 입을 수 없었다. 돌려가며 입어야 했기 때문에 같은 디자인의 검은색 브래지어 하나를 더 구매했다. 할인 기간이 끝나서인지 브래지어 하나에 8만 원이었다. 하나를 더 구매할 엄두는 나지 않아서 현재는 두 개의 브래지어를 돌려가며 입는다.
내 브래지어 사정에 대해 가만히 듣고 있던 동거인이 일침을 날렸다.
“그거 브래지어가 아니라 그냥 젖걸이 아냐?”
나는 그녀의 말에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 지금 내 브래지어는 속옷이라기보다는 기능성 젖걸이었다. 이 무겁고, 걸리적거리고, 축 처진 가슴을 보관하는 젖걸이.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이 브래지어를 내 몸에 꼬맬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무늬가 다양한 속옷, 색깔이 통통 튀는 속옷에 대한 욕심이 없다. 그저 가슴 없는 몸에 대한 욕심만 있다. 그래서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그런 간편한 몸에 대한 갈망만이 남아 있다.